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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Nov 04. 2019

어느 날 갑자기 휴대폰 알람을 껐다

"개미 새끼도 이렇게 죽이진 않을 거예요."



실은 문장에서 개새끼만 남겨두고 지우고 싶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 있느냐고, 화내고 소리치고 따져 묻고 싶었다.


10월 29일 화요일 오전 8시 59분, 전 직원에게 보내는 대표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 안에 구구절절 무언가 내용이 적혀있었으나 이미 제목만으로 충분했다. 비상경영 체 선포였다. 첨부된 PDF 파일을 열자 그 안에도 메일에 담겨있을 내용과 비슷한 이 몇 페이지에 걸쳐 적혀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씨부리는건가. 파일의 맨 끝에는, 11월 1일부로 무기한 무급휴직을 당할 직원들의 명단이 있었다. 열  명 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보며, 우리 팀이 통으로 날아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혹시라도 자회사에 입사를 원하거나 퇴사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말해주기를 바라며, 경영기획팀 대리에게는 자료 백업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회사를 2년 가까이 다니면서 본의 아니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나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해결방법을 찾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감정은 나중 문제였다.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고 난 뒤에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서운함을 표현해도 늦지 않았다. 그래서 였을까. 그 순간에도 나는 당장 이력서를 쓸 생각을 했다.

 

"시디님, 저희 얘기 좀 잠깐 해야 되지 않을까요?"


전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고 촉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난 몇 달간의 분위기쯤은 읽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최근 회사의 모양새는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기분 탓이라면 기분 탓일 수 있으니까, 아직 아무것도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야만 했다. 병신 같이 내가 그랬다.  


결국 부사장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회의실로 들어온 부사장님은 지금 우리 회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와 왜 이렇게까지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반의 상황'에 대해 털어놓았다. 선 통보 후 설명이라니. 무슨 회사가 이따위인가. 나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 울컥 솟구쳤다. 참으려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소용없었다. 찬물 같은 걸로 가라앉힐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삼키고 또 삼켜도 아래로 가라앉지 않을 그런 울음이었다.


"낮술이나 하러 가자."


아침 11시부터 이어진 술자리는 오후 3시도 안돼 내가 정신을 놓고 나서야 끝이 났다. 빈 속에 제대로 된 안주도 없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켰으니 당연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끼리 으쌰 으쌰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팀원들을 다그치고 잔소리해가며 지난 몇 달을 버텨왔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내가 병신같이 왜 그랬을까. 팀원들에게 미안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겨진 팀원들' 에 대한 걱정도 앞섰다. 이 와중에도 발동되는 오지랖이라니.  함께 '팽 당한' 팀원들이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일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에 뱀의 머리가 되겠노라며 선택했던 회사였다. 그런데 이렇게 땅을 누비 지도, 하늘로 승천하지도 못하고 이무기의 머리로 살다가 소멸하고 말다니.


울음의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회사를 차려본 적도, 꾸려본 적도 없는 나조차도 회사 경영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알 수 있었다. 감히 나는 시작도 못 할 거라는 이야기를 늘 해왔으니까. 회사는 언제든 어려워질 수 있고, 인원 감축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간 회사를 위해 고생해왔던 직원들을, 3일 전에 이런 식으로 내팽개칠 수는 없는 거였다.


정신을 차리니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이제 퇴사까지-겉으로는 무급 휴직으로 포장된- 2일이 남아있었다. 전날과는 다르게 어쩐지 홀가분했다. 그래, 내가 어차피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책들과 서랍 곳곳에 넣어두었던 짐들을 종이백에 하나둘 챙기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노동부 관련된 내용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팬이 안티로 돌아서면 가장 무섭다고 했다. 비록 내가 대표의 팬도, 회사의 팬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일에 대한 열렬한 팬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은 다 하고 싶었다. 증거자료를 모으고 경고성 메일을 보냈다. 피할 수 없다면 소송까지 불사할 작정이었다. 그만큼 나는 2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치열했다.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만약 내가 이십 대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할 수 있었을까. 상황에 빠져 울고 자책하며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연륜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일이 내 인생을 무너뜨리거나 흔들지 못할 거라는 것쯤은 다. 내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내가 막을 수 있던 것도 아니니, 그저 다른 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 된다는 걸 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당연히 불면증은 사라졌다. 잘 자고 잘 일어난다. 아직까지 '노예근성'이 남아있어서 아침 알람 없이도 매번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래서 31일 밤 덜컥 강릉 호텔을 예약했다. 어차피 남는 건 시간이고 집에 있어봐야 할 것도 없는데,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책이라도 읽고 글이라고 쓰자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강릉의 한 호텔 객실에 앉아 바다 야경을 곁에 두고 이렇게 글을 쓴다. 체크인을 하고 맛집이라는 곳에 가서 막국수에 맥주를 먹고 시장을 구경했다. 혼자 여행하고 싶다고 서른부터 이야기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오게 됐다. 챙겨야 할 팀원도 없고 눈치 볼 상사도 없고, 해내야 할 프로젝트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다.


홀가분하면서 쓸쓸하고 즐거우면서 울컥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으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이별을 맞이한 사람처럼 한없이 외롭고 괴롭다. 그런 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와 도움을 건넸다. 그리고 오늘, 강릉 오는 길에 희망도 살짝 엿봤다. 이럴 줄 모르고 미리 사뒀던 이병률 작가의 '혼자가 혼자에게'를 읽다가 나에게 하는 듯한 말을 찾았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아니면 어쩌다 '혼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함께 읽고 괜찮아지면 좋겠다.

 


'당신이 혼자 있는 시간은 분명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혼자인 당신에게 위기가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막막함으로부터 탈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닥쳐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 외로움 앞에서 의연해지기 위해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면서 써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다.'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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