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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Sep 20. 2020

좋아서 하는 일

"지금 뭐가 제일 힘드니?"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눈물도 다 닦아낸 참이었다.


"아~ 저 지금 간신히 마음 추슬렀는데 왜 또 들어오세요."

"야, 지금 마음 추스르는 게 중요해?"


이미 오전에 한 소리를 들었다. 차장과 회의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업무 때문에 그러겠거니 생각했다. 모두가 며칠 째 새벽달을 보며 퇴근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전날 몇몇 막내들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래서 애들을 들여보내자고 시디가 말한 후라 당연히 그 이야기겠거니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야기'가 맞기는 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왜 그랬냐는 다그침부터 들었다.


"네?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정말 몰라서 물었다. 나 역시 계속되는 새벽 퇴근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한 말도 기억 못 하고, 할 말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시디를 화나게 할 만큼 뭔가 건방지게 굴고는 기억도 못 할 정도가 된 건가.


시디가 막내들은 들여보내자고 한 말에 차장이 다급하게 안된다고, 지금 자기와 같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 지금은 퇴근 못 시킨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그리고 그 단호함에 옆에 있던 내가 웃은 게 분노의 불씨를 지폈다. 상사가 이야기하는데, 심지어 막내들이 새벽에 퇴근한 걸 모르는 게 아닌데 자기 프로젝트를 들먹이며 반대를 하다니. 사실, 차장이 그 문제로 혼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업무를 배정하는 데 있어서도 안된다 곤란하다 말해 여러 번 회의실로 불려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저런 발언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지어 그 '막내들'이 보는 앞에서 하다니. 나는 일종의 실소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다.


화를 참지 못한 시디가 회의실을 나가고, 이사와 함께 이야기를 했다. 시디를 비웃은 게 아니라 너무 단호하게 이야기한 차장 때문에 웃은 거라고. 변명인지 해명 인지도 모를 그 말을 하는데, 왠지 억울했다.  


우리 본부는 다른 대행사와 다르게 팀으로 나눠져있지 않다. 프로젝트에 따라 리더가 정해지고 구성원을 꾸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일을 하게 되고 일정이 겹치는 경우도 많았다. 목요일에 퇴근하기 전에, 진짜 아침에나 퇴근할 거 같다고 말하는 막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연히 금요일에는 출근 못 하겠구나 생각해서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전했다. 내가 애들을 챙기지 않은 것도 아닌데 고작 한번 웃었다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곱씹을수록 억울했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아요. 일정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제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지금 다 힘들잖아. 다 새벽에 퇴근하고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 내가 힘으로 눌러가면서 지키고 버티고 있잖아. 거기에 불씨 던지지 마. 무례하게 굴지도 말고 선 넘지도 마."


차장의 해명에 이사가 대답했다. 시니어는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감이나 무게감을 느끼고 있어야 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가질 파급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어야 했다. 차장도 나도 그걸 깜빡한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차장 하나가 이미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 안돼요 시디님~ 지금 XX 이는 보내면 안 돼요."라고 했다고 한다. 멀리 있어서 그 차장의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된 불씨가 다른 차장이 휘발유를 들이부었고 내가 정점을 찍은 거다. 시니어라는 사람들이 다 그런 반응이었으니 화날만했다.


그렇게 시작된 금요일 하루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그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 4시에 하기로 한 회의에서 방향도 알지 못하고 아이디어도 몇 개 준비해오지 않은 막내들에게 화가 났다. 혹시나 내가 놓친 부분들이 있나 싶어 왜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왔는지 몇 번을 물었는데, 그저 자기 고집일 뿐이었다. 그래도 차근차근 설명시켰는데 이해했냐는 질문에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막내에게 또 화가 났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버틸만했다.


당장 다음 주 수요일에는 늦어도 심의를 넘겨야 하는데 카피는 계속해서 컨펌 나지 않고 있었다. 벌써 몇 번씩이나 카피를 써서 들이민 상황이었다. 결국엔 글로벌 메시지를 번역한 버전으로 가자고 결론이 났다.


"결국 우리 카피가 별로였다는 거죠."


기획 차장의 비아냥거리는 농담도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가 저녁 7시쯤이었는데 성우 스케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월요일에는 녹음하겠다고 해서(그래야 되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미 다 체크해놓긴 했지만 잘 나가는 성우를 금요일 저녁에 전화해서 월요일 부킹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화요일 낮 12시로 잡았는데 기획에서 난리가 났다. 스케줄이 너무 빠듯하다는 거다. 심의가 반려 날 가능성은 적지만 그러다 온에어 날짜를 못 맞출 수 있다는 거다.


아니, 이게 내 탓인가?


수많은 지랄 끝에 결국 화요일 낮에 녹음하기로 결정하고 광고주들도 녹음실로 부르기로 했다. 시디에게 보고를 하고 바깥 로비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만사가 짜증이 나는 거다. 배도 안 고프고 당장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싶고 자꾸만 울컥했다.


하나 둘 퇴근하고 몇 사람이 안 남았을 때, 그래 나도 가자 싶어 가방을 챙기는데 시디가 불렀다.


"너 요새 너무 힘들어 보여."


단호한 차장 때문에 웃은 거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이사에게 들었다고 했다. 오해가 좀 있었구나 싶어 미안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나는 분위기를 잘 맞춰야 한다고 했다. 웃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이미 불씨가 두 군데서 던져진 상황에서(물론 나는 하나는 못 들었지만) 그런 반응을 내가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했다. 자신도 예전에 그런 것 때문에 상무님에게 많이 혼났다고 했다.


"일단 니가 카피를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만들어볼게. 그 시간을 만들어볼게. 일단 캠페인 정리하고 이런 거는 나중으로 하자. 나는 니가 카피로 안타나 홈런을 한번 멋있게 쳐야 할 거 같아."


그러면서 시디는 내가 나다움을 찾으면 좋겠다고 했다. 캠페인 정리도 해야 되고 카피도 잘 써야 하는데, 요새 자신도 그렇고 이사도 그렇고 계속 이 카피는 아니라고 잔소리하고 뭐라고 하니까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게 너무 드러나고 그런 에너지가 바깥으로 나오니까 주변에서 영향을 너무 받는다고 했다.


그렇게 또 울었다. 코가 헐 정도로 울면서 시디랑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이사까지 들어왔고 또 울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진 걸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 일을 하면서 보람이 있거나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없다고. 좋아서 하는 일이 잘해서 하는 일이 됐으면 좋겠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다른 회사에서는 일 때문에 힘들었는데 지금은 사람 때문에 힘든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제가 수학을 되게 못 하는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나와서 수학 문제 풀어보라고 할 때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이 문제의 답을 모르는데 선생님도 보고 있고, 그 반에 학생들도 다 저를 보고 있잖아요."

"너 니 카피 내가 안 사고, 광고주가 안 사서 그런 게 큰 것 같아."

"아니에요. 그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없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게 제일 큰 거 같은데 뭘. 사람들이 선택하면 좋은 카피인가? 니가 쓴 카피가 온에어 되면 그게 좋은 거야? 멀리 봐 은선아. 자신감을 잃으면 안 돼. 그리고 지금 다 힘들잖아. 너 그때마다 이렇게 울 거야? 국장되고 이사돼도 이렇게 울 거야?"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3년씩이나 이 일을 한 카피라이터가 입사를 했고 누구보다 먼저 부장으로 진급을 했다. 그러면 잘해야지, 당연히 잘해야지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압박감이 나를 누르면서 스스로 너무 괴롭게 했고 어떻게든 저 사람들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지긋지긋한 금요일이 결국 새벽 1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2년 반 전에 썼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지더냐. 금, 상아, 작은 꽃 한 송이는 어떤가?'


몇 년 전 한 시디님의 책상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의 내용을 적어둔 거였다. 그래! 다른 사람의 평가나 칭찬에 좌지우지되지 말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도 해두고, 심지어 책을 쓸 때도 저 말을 적어두고선 이렇게 또 까먹은 거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게 나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보같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이 일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잘하려다 보니 너무 용을 쓰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게 나를 괴롭힌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도대체 왜 카피라이터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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