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 없는 첫 번째 삶
“언제부터 리더십이 있으셨어요?”
며칠 전, 내가 처음으로 CD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을 때 데리고 있던 팀원에게 DM을 받았다. 브런치에 쓴 글을 봤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도, 링크드인에도 링크를 올려두었으니 주변 지인 누구나 이 글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팀원은 예상 못 했다. 아무튼 스크롤을 한참이나 내리면서 봐야 할 만큼 장문의 메시지였는데, 나는 디테일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저는 그때 시디님이 말도 안 되는 요구에도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이끌어가고 노력하시면서 결국 제안서라는 형태로 만들어 내시는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그랬었나?
그 회사로 가기 전, 나는 처음으로 CD가 된 부장님 밑에 팀원으로 있었다. 그분 나름대로는 노력했을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서툴고 부족했고, 그리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제안서를 쓰지도 못했고, 발표할 때도 손을 벌벌 떨어서 오히려 광고주가 걱정하고 위로해 줄 정도였다. 게다가 나에게 인격모독을 하기도 했으니 나는 CD가 되면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절대, CD가 처음인 사람 밑으로 가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33살, 덜컥 내가 CD가 됐다.
10여 년 전,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들을 끌고 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프로젝트들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부족한 경험과 지식으로 해내봐야 얼마나 해낼 수 있었겠냐만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좋은 언니, 좋은 누나, 좋은 선배까지 되고 싶어 했으니 심신의 과부하가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었다.
그러니 회사가 망했을 때, 한순간에 팀이 날아갔을 때 그렇게 아침 10시부터 콩나물국밥집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울었겠지.
전 회사를 퇴사하기 전, 면담을 하고 싶다던 팀원이 있었다. 10년 정도의 경력을 가진 그녀는 커리어 패스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고, 오랜 대화 끝에 마지막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언제부터 리더십이 있으셨어요?”
새삼스럽게 당황했다. 내 리더십은 타고난 걸까? 길러진 걸까? 그저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세서 주도적으로 밀고 나간 것뿐이라고, 워낙 큰 키에 눈에 띄어 덜컥 리더가 된 것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타고난 걸 수도 있나?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는 반장이나 부반장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수줍음이 많았고 주목받는 게 조금은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한번 달라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번 더 크게 달라졌다.
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였군.
주말에 이직을 위한 인성검사를 하다가 모니터에 뜬 몇 문장에 웃었다. 리더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의 생각을 묻는 것이었는데, 두렵다거나 피하고 싶다는 대답 근처에는 내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지도 않는 것이었다.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려고 하고 시키기 전에 움직인다는 답을 클릭하는 걸 보면, 원래 난 이런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17년을 일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리더들을 본 것 같다. 연차는 제법 쌓였지만 리더라고 하기에 애매한 사람, 누가 봐도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사람, 입으로만 일하는 사람, 웃으면서 부드럽게 할 말 다 하는 사람, 엄청난 포스로 팀원들을 누르며 압도하는(어쩌면 지나치게 강압적인) 사람 등등…
레퍼런스 삼을 수도, 반면교사 삼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나도 내 나름의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한 것 같다. 처음과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 정말 내가 잘하고 있나 계속 생각을 되새김질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되고 싶다가 그게 또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좋은 게 좋은 거라 말하는 리더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10년 동안 어떤 리더였을까. 어떤 리더로 기억되고 있고, 기억되고 싶을까. 10여 년을 리더 직급을 달고 있었으면서도, 퍼블리에 리더십 콘텐츠를 3편이나 쓰면서도, 그리고 또 한 편의 콘텐츠를 기획하면서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잠깐, 더 일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거긴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