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빵과 관련된 행사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부터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에 이어 수능과 크리스마스까지 치르고 나면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곤 했다. 이 모든 행사의 기획부터 판매까지 모두가 내 몫이었다.
우선 설날부터 입학과 졸업시즌이 이어지는 1,2월에는 롤케이크와 같은 선물세트가 많이 팔렸다. 명절 차례를 지내고 친척 집에 다녀오기 위해 나선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 선물하는 것이 과일 외에도 빵이나 롤케이크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난 참 억척스럽게도 살았다. 빵집을 하는 12 년 동안 내게는 명절이 없었다. 공장직원이나 매장 직원들 모두 휴가 보내고는 홀로 가게를 지켰다. 한 집안의 며느리이기도 했던 나는 명절 며칠 전부터 재료 준비를 해서 시댁에 모든 음식을 만들어 놓고 한밤중에 서울로 왔다. 그리고 명절 당일은 썰렁한 가게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선물세트를 팔았다.
단무지 하나 없이 짜디짠 라면 국물을 넘길 때 목이 메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나 혼자 여기에서 뭐 하고 있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 살아야 했던 것은 결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야만 겨우 직원들에게 명절 보너스라도 챙겨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깊은 사정은 정말 그 누구도 몰랐다.
밸런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 또한 제과점이 특수를 누리는 날 중 히나다. 물론 저절로 물건이 팔리는 것은 아니다. 관심이 없는 고객이 주머니를 털어 가족이나 애인 또는 회사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도록 예쁘고 다양한 제품을 준비해야 한다. 눈에 띄게 현수막을 다는 것은 기본이다. 수제 초콜릿까지 만들었던 우리 집은 다른 집과 차별화되었다. 게다가 처음 왔던 공장장은 초콜릿 조형물까지 만들어 주어 동네 사람들이 엄청 신기해했다. 그 제품은 꽤나 비쌌기에 눈요기로만 전시할 예정이었으나 우리 빵집의 단골손님이셨던 변호사께서 가족선물로 사 가셨다.
밸런타인데이에 비해 화이트 데이는 공장 직원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물건을 팔 수 있는 날이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태릉 어딘가의 사탕 도매상까지 찾아가 다양한 제품을 사다 팔기만 하면 되었다. 가게 앞에는 꽤 넓은 공터가 있어 아주 잔칫상처럼 큰 상을 차려놓고 다양한 사탕바구니들을 팔았다. 전혀 관심이 없던 무뚝뚝한 아빠들도 제과점 앞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보고는 아이들을 위해 사탕바구니 하나씩을 사갔다.
5월은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또 스승의 날과 성인의 날까지 있다. 케이크와 선물세트뿐만 아니라 운동회 등 학교 행사가 많아 단체 빵 주문이 폭주하는 달이다. 내가 요즘 이렇게 어깨를 잘 쓰지 못하는 것은 아마 당시 학교로 빵배달을 많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에 라면박스 가득 빵을 담은 상자를 들고 4층까지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깨가 빠질 것 같았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때는 바쁘게 배달을 해야 해서 힘든 것도 몰랐으나 10년 이상 이어졌던 노동으로 이제는 온몸 어디 한 곳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밉살맞은 공장장 중 한 사람이 내게 빙수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사람이 가르쳐 준 레시피라고는 그저 아낌없이 얼음과 팥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빙수떡과 후르츠 칵테일 듬뿍 올리고 연유와 딸기시럽까지 넘치도록 뿌려 주는 것이다. 4,000 원 빙수 한 그릇이면 둘이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는 여름이 다 가도록 아르바이트생까지 두고 정말 엄청나게도 얼음을 갈고 또 갈았다. 지금도 산책길에서 만나는 옛 손님들은 내가 만든 빙수가 생각난다고 한다.
빼빼로 데이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하트나 지팡이 모양 등의 왕빼빼로를 만들었다. 주변 학교의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기성품의 빼빼로를 주는 것보다 우리 집에서 만든 독특한 빼빼로가 더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수능이 다가오면 수능 합격선물세트도 준비했다. 기존 떡집에서 만드는 평범한 찹쌀떡이 아니라 빵집답게 다양하게 빵가루를 묻힌 찹쌀떡과 엿 등을 넣어 우리 집만의 선물세트를 만들었다. 나도 가끔 그 찹쌀떡이 생각난다. 아주 부드러웠고 다양하게 빵가루를 묻힌 떡은 얼마나 향이 좋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큰 행사는 크리스마스다. 요즘은 크리스마스 때도 그렇게 캐럴송을 틀지 않지만 우리는 1 주일 전부터 가게에 번쩍번쩍 조명을 켜고 풍악을 울렸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최대한 내야 했다. 여자들은 붉은 고깔 모양의 모자만 썼지만 가족 중 하나는 산타복까지 입고 가게 앞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캔디까지 나눠주며 분위기를 돋웠다.
모 체인점에서는 케이크를 여름부터 준비해 냉동실에 보관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 1주일 전부터 버터케이크와 고구마 케이크부터 준비해 여러 개의 냉장고에 꽉꽉 채우고는 23일부터는 꼬박 밤을 새우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케이크를 보면 꼭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연말 기분도 낼 겸 한 번쯤 케이크를 사 먹고 싶지 않았을까?
게다가 30 % 정도 세일 행사를 하거나 샴페인까지 주었으니 1년 중 가장 싸게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날이다. 그러니 케이크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특히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직원들을 위해 수십 개씩 사가는 것은 물론이요, 아파트 주민들도 웬만하면 하나씩은 사갔던 것 같다. 그러나 겉만 화려했지 직원들에게 보너스 주고 재료비까지 주고 나면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다른 집에서 케이크를 사가게 할 수는 없었다. 주변 빵집 주인들은 정말로 내가 싫었을 게다. 그런데 그걸 알아줘야 할 고객들은 내가 고맙기는커녕 그렇게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행사 준비하느라 1년 내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고 그 빠른 템포 때문에 한시도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아파트 벽보도 붙이는 숫자가 한정되어 있어 홍보물 붙이는 날이면 새벽부터 관리사무실에 가서 줄 서 있지 않으면 제 때에 홍보를 할 수가 없었다. 현수막 디자인도, 가게 창문에 붙일 홍보물도 다 내가 만들었다. 또 한밤중이면 퇴근한 남편과 함께 고속버스터미널 포장용품 상가에 가서는 포장지와 포장도구 등을 사 와서는 집안 가득 선물세트를 만들어 놓았다.
"빵집은 엄마의 취미생활 이잖아" 하며 큰 딸은 불만스럽게 말하곤 했다.
정말 가족들마저 나의 희생을 몰라주었던 것이다. 나도 은행을 그만두고는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어렵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급히 가게를 시작한 것인데 빵집을 운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리고 딸아, 빵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취미생활 수준은 아니란다. 엄마는 꼭두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일요일도 없이 12년을 살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어도 내 손에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은행 다닐 때 받던 월급의 반도 안 되었다.
하긴 내가 빵집을 하는 바람에 우리 집이 엉망이었던 것 인정한다. 여행 한 번 못 갔고 가족들은 한밤중이나 돼서야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으니 우리 모두 힘들었지. 엄마의 돌봄이 필요했던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도, 한참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너도, 갑자기 치매가 온 친정엄마도 또 건설회사에 다니느라 새벽 출근을 해야 했던 남편도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으니 늘 피곤했을 거야.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힘들게 살고 말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