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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Mar 25. 2024

은행원에서 빵집 아줌마로!

드디어 20여 년간의 직장 생활을 끝냈다. 처음  은행에 들어갈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고 정년퇴직 때까지 다닐 생각이었다. 지점이 서울에 한 개뿐이라 80 명도 안 되는 직원들은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일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사고과 등으로 직원들 사이에 경쟁심이 생기며 화목했던 직원들은 차차 시기와 질투로 서로를 헐뜯으며  감정의 골이 깊어만 갔다. 게다가 남녀차별로 내가 신입 행원 교육을 시킨 남자 직원이 멀지 않아 내 상사로 오는 하극상까지 벌어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하더라도 그런 분위기에서 더 이상은 일하고 싶지 않았다. 치사한 일본 스태프들은 한국 시니어들을 쫓아내기 위해  신입 남자직원들을 부추기며 낯선 분위기를 만들었다. 신입 남자 직원들은 자기들도 곧 그 상황에 쳐하리라는 것을 왜 모를까? 일본 사람들보다도 그들에게 놀아나는 한국 사람들이 더 싫었다. 그때 명예퇴직을 실시했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우리 동기 중 사표를 낸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은행에서는 자기들의 의도대로 내보내고 싶던 사람들을 쫓아냈을까? 내가 보기에 사표를 낸 사람은 다른 직장으로 이동할 능력이 있거나 그만두어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긴 내 생각과 달리 나도 내보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은행을 그만두던 날 시원섭섭하다기보다는 애증이 컸다. 동경은행은 일본 은행이었지만 내 친정집과도 같았다. 내가 가장 순수하던 때 온 열정과 청춘을 바쳐 일했던 곳이다. 동경은행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 어린 내게 반일 감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고 그저 나의 든든한 일터였다. 물론 어떻게 일본 직장에 다니냐며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두둑한 월급 덕분에 어려웠던 생활도 눈에 띄게 나아졌고 빠른 퇴근으로 야간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자 편해졌다기보다는 어떤 상실감과 무료함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틈새를 메꾸느라 문화센터에서 요리 재봉 퀼트 등 빽빽하게 일정을 짜서 바쁘게 나날을 보냈다. 은행과는 전혀 다른 세상, 아줌마들만의 세상이 새로웠다.

     

당시 나는 중형아파트 두 채를 살만한 거액의 퇴직금을 받았다. 도대체 이 큰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를 몰랐다. 강남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두 채를 사? 합정동 근방의 작은 건물은? 이렇게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시흥과 용인까지 부동산 중개소를 얼마나 쑤시고 다녔는지 모른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동산 중개사 사장은 

"아, 그냥 목동아파트를 전세 끼고 여러 채 사요"

그때 그 어떤 것을 샀어도 나는 지금 큰 부자가 되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아주 소심한 은행원이라 그 어떤 것도 사지 못했다.    

 

그렇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대기업에 잘 다니던 남편이 회사를 나오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두둑한 예금통장이 있었으나 그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숨을 죽이고 살았다.   

   

당시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재취업을 시도한 근거를 내야 했다. 매번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번거로워 나는 제과학교에서 실업교육을 받았다. 늘 '아이들에게 직접 빵을 구워주는 자상한 엄마'를 꿈꾸곤 했는데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고소하게 빵이 익어가는 모습은 정말로 신기했다. 빵집에서나 볼 수 있던 다양한 빵과 과자가 내 손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우리 집 주방은 빵공장과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빵과 과자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제과 제빵사 자격증까지 땄고 운명의 사람을 만났으니 바로 제과점 체인 사장이다. 당시 새로운 일자리와 퇴직금을 운용할 방법을 찾던 내게 딱 맞는(?) 사람이었다.   

   

전부터 나는 은행을 그만 두면 멋진 카페나 빵집을 하고 싶었다.  내가 꿈꾸던 카페는 커피만 파는 곳이 아닌 주류까지 파는 멋진 곳이었으나 두 딸을 가진 내가 술을 파는 카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빵집으로  마음을 굳히고 차차 일이 진행되었다. 내가 개업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는 주변 지인들이 내가 퇴직했다는 사실을 알자 수시로 돈을 꾸어달라는 부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직금을 푼돈으로 여기저기에 빌려줄 수는 없었다.  

   

체인 사장이 찜한 빵집 앞에서 나는 몇 날 며칠이고 앉아 있었으나 손님이 별로 없었다.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는 장담했다. 자기의 빵집 운용 기술에, 유능한 공장장(당시 제빵사들은 팀으로 다녔는데 그 팀장을 공장장이라 불렀다)에, 친절한 나까지 있다면 제과점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다.   

  

그렇게 시작한 빵집에 나는 손도 대지 않고 모셔두었던 퇴직금을 마구마구 쏟아부었다. 가게 프리미엄으로, 매장과 공장 보증금으로, 직원들 숙소로, 또 각종 빵기계와 쇼케이스 등의 구입자금으로 엄청나게 돈이 들어갔다. 지인들이 5천만 원만 빌려달라고 할 때도 벌벌 떨며 빌려주지 못했는데 말이다. 

     

거액을 투자한 나는 덜컥 겁이 나 무당까지 찾아갔다. 그녀는 내게 무슨 업인가 있어 남에게 먹을 것을 파는 직업이 잘 어울린단다. 게다가 내가 찜한 가게 터는 그 기가 어찌나 센지 그 기를 누르면 큰 부자가 될 것이고 아니면 망할 자리라 푸닥거리를 해야 한단다. 이미 점포 계약까지 마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큰돈을 주고 난생처음 굿까지 하게 되었고 무시무시한 칼날 위에 선 무당을 보며 그저 가게가 잘 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나는 은행원에서 엉뚱하게 빵집 아줌마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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