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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un 21. 2024

빨래터에서 무슨 일이?

빵집은 빵만 파는 곳이 아니라 때로는 빨래터가 되기도 한다. 가끔 속이 상해 미칠 것 같다가도 누군가에게 답답한 속내를 풀어내고 나면  살얼음 떠있는 짭조름한 동치미 국물이라도 마신 듯 체기가 쑥 내려갈 때가 있다.      

칼바람 부는 겨울날에는 난방기를 세게 틀어도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가게는 써늘하다.  혹시라도 손님이 빵 사러 오셨다 추울까 카운터 옆에는 커다란 전기난로를 놓았다.  겨우 아침 빵 정리가 끝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짧은 와인색 모피코트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내고는,

"학원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네요. 좋은 곳 아시면 추천 좀 해 주실래요."

극성 엄마는 아니어도 아이들 학원에 대해서는 소문을 듣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근처 학원  선생님의 성향이나 학습 방법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다 보니 조금 길어졌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전기난로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녀의 바지가 눌어붙은 것이다. 지나친 친절 덕분에 몇 천 원어치 빵을 팔려다 그만 비싼 바지 값을 물어줘야 했다. 

     

"많이 잘라놔요. 먹어봐야 사간다니까요"

공장장의 말에 따라 우리는 새로 나온 빵을 알리기 위해 시식코너에 여러 종류의 빵을 푸짐하게 잘라 놓았다.  제과점 안으로 머리를 한껏 올려 묶고 산뜻한 반팔 반바지 차림의 아가씨가 강아지를 안은 채 들어왔다. 요즘은 내가 강아지를 키우기 때문에 강아지가 예쁘지만 그때는 강아지를 귀한 아이라도 되듯 껴안고 뽀뽀를 해대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다른 손님이 올세라 창밖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와~ 시식빵이네!"  그녀는 강아지 한 입, 자기 한 입 시식빵을 먹기 시작했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 자기도 한때는 빵을 만들어 봤다는 둥 신이 나서 떠들었다.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며 빵 포장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방금 시식용으로 썰어놓은 미니 호두파이 한 판을 다 먹어버렸다.

"어머 먹다 보니 다 먹어버렸네요 호호 "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는데 식빵 하나를 가져와서 빠르게 계산을 하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당시 식빵은 2,300원이었고 호두파이는 5,000원이었다.  

    

빵을 사지 않아도 단골들은 자주 빵집에 놀러 왔다. 자주 오는 단골 중 자매가 있었다.  항상 바쁘게 살아온 나는 친정 언니와 다정하게 다녀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늘 두 손을 꼭 잡고 다니며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웃음꽃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불쑥 그 언니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하고  얼굴은 한껏 상기된 채 가게 안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더니 

"이 인간이 미쳤나 봐요. 내참.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틈만 나면 숨어서 휴대폰을 보고 전화가 걸려오면 베란다로 달려 나가기 바쁘던 남편은 기어코 그녀에게 꼬리가 잡혔는데 도리어 큰 소리란다. 어떤 위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분이 풀릴 때까지 열심히 들어주면 되었다. 얼마 전 그 부부를 슈퍼 앞에서 봤는데  그녀의 남편은 주변머리만 있고  배는 남산만 했다.  

   

자주 하소연을 늘어놓기 위해 오던 손님 중 한 분은 선생님이었다. 팥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혼자 먹기도 많은 우리 집 팥빙수를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고는 늘 팥을 더 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학교에서 상사인 교장 선생님과 부딪힌 날이면 팥빙수를 먹으러 왔다. 그녀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기에 어떤 날은 그저 조금만 참아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그녀를 대신해 실컷 욕을 퍼부어 주기도 했다.

"내가 지금 그만둬도 연금이 월급만큼은 나오지만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어머, 연금이 그렇게 많이 나와요?"

순간 나는 그녀의 고민이 걱정되기보다는 교사라는 직업이 부러웠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던 그녀는 과연 정년까지 채우고 학교를 그만두었을까? 

   

종일 에어컨 바람에 지친 사람들은 저녁 식사 후 시원한 밤바람을 쏘이러 나왔다. 한여름 밤 아파트 중심 광장은 밤늦게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로 건너편이 치킨집이었고 우리 집에는 팥빙수가 있다. 사람들은 잠시 갈등을 할 것이다. 

"치맥? 아니면 팥빙수?" 

    

산처럼 쌓아 올린 딸기 알맹이와 인절미, 후르츠 칵테일에 달콤한 연유까지 듬뿍 뿌린 빙수는 꽂아 준 숟가락을 살짝 빼기만 해도 마구 쏟아져 내려온다. 모두 하나라도 놓칠세라 살살 비벼보지만 그들이 돌아간 탁자에는 늘 흥건하게 빙수가 흘러있었다.  팥빙수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빙수를 더 높이 쌓아 올렸다.   

   

밤 10 시쯤이면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다. 야외 테이블에는 아직도 몇몇 사람이 남은 빙수를 앞에 놓고 소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게 바로 앞 두 테이블에는 남학생 둘과 아가씨 둘이 각각 앉아 있다가 아가씨들이 먼저 간 뒤 학생들도 곧 돌아갔다. 얼마 후 아가씨가 급히 돌아와서는 휴대폰을 놓고 갔단다. 그동안 가게 앞에 오고 간 사람도 없는 데다 빙수 그릇을 치우러 갔을 때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학생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남학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다. 이유를 캐묻던 학생의 아버지는 급히 달려왔고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며 목소리가 한층 커지고 있었다. 내가 또 괜한 짓을 했구나.     


아들을 찾느라 그 가족들은 한동안 뛰어다녔고 밤 12시쯤 남학생은 휴대폰을 가져왔다. 그리고 놀이터 저쪽 어딘가에서 아버지께 혼나고 있는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 덕분에 귀한 손님 하나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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