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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드림 Sep 19. 2021

나만 이상한 걸까?

<D.P.>의 명대사

재무학을 전공하고 들어간 첫 회사는 증권업계였다. 무엇이든 열심히 할 의지로 가득 찬 신입이었기에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여느 증권회사와 같이 여의도에 위치했으며 잠실에 사는 나는 9호선이 없을 시절 8000번대의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가장 막힌다는 88 고속도로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달려 출퇴근을 계속했다.


새로운 용어를 익히거나 처음 하는 회사생활로 배울 것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갈수록 실망은 커져만 갔다. 군대식 문화라는 게 이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잔뜩이었다. 사수가 부르면 "네."하고 다이어리가지고 가는데 크게 대답 안 했다고 마음에 안 든다 지적하고, 고객과 통화를 끊으면 누달려와 내가 잘못된 점을 줄줄 읊었다. 그들만의 용어로 지시사항을 나열하기 바빴고 인턴과는 비교도 안되게 지적사항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많을까? 아직 사회생활을 몰라서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적고 따라가려 노력했다. 계약서에 적힌 근무시간은 허울에 불과했고 사수에게 "혹시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라고 묻고도 할 일이 없다면, 눈치만 보며 앉아있는 게 야근 시간이었다. 사수가 가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는 게 당연시되는 문화였다. 회식에서도 제대로 밥조차 먹을 수 없으며 젤 늦게 가더라도 그다음 날 회사에 젤 먼저 도착해야 하는 게 신입이었다.


대학 시절 친구가 인턴을 한 이곳은 그 당시에는 호황기를 누렸으나 증권가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점점 기울어가는 지점에 내가 입사를 한 것이다. 하루에도 지적받는 게 수백 가지였으며 옷차림과 사생활까지 까야하는 게 신입이었다. 그들을 즐겁게 할 가십거리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으면 쥐어짜서 뭐라도 웃겨야만 하는 곳이랄까?


어느 날 팀장이 불러 다이어리를 가지고 가니 뒤쪽에서 옆팀 사수가 달려왔다. 뒤에서 보니 내 블라우스가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블라우스가 튀어나왔는지 보이지 않았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 엄마도 성인 이후에 안 때리는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그 노처녀는 그렇게 그 회사에서 계속 버텼을 것이다.


친구도 만날 시간이 없고 자유시간이 전혀 없던 회사-집-회사로 이어지던 생활이 이어졌다. 탈출구가 없었으니 자꾸 말수가 줄어들고 사소한 부름에도 놀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오던 날이었다. 버스나 택시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그때 차가 막힐까 봐 평소보다 1시간 더 일찍 출발했다. 88 고속도로가 꽉 막히고 또 사고차량으로 움직이지 못했던 때이다.


불안한 느낌에 사수 및 윗 상사에게 먼저 전화를 했고 최대한 빨리 가겠는데 아직 상황을 모르겠다고 솔직히 전했다. 비에 맞은 생쥐처럼 쫄딱 비를 맞고 회사에 도착하니 9시 3분, 지각을 했다. 태풍으로 지각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 눈에는 지각한 신입만 보였다. 이어 사수를 포함한 상사 여러 명이 차례로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그들은 정확히 한 명 당 30분 이상 나에게 훈계라는 명목으로 잔소리를 했다.


"네가 여기 물을 얼마나 흩뜨려 놓았는 줄 알아? 회사 전체 분위기를 망쳐놓았다고."


이게 주 이유였다. 세 명 다 비슷한 레퍼토리는 자기는 입사 이래로 지각 한번 한적 없다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과거의 자기 자랑으로 시작해 끝도 없는 훈계라는 이유의 잔소리를 한 명당 30분 넘게 지껄였다. 업무를 할 시간에 신입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세명이었다. 그때 나는 결심을 했다. 이런 배울 점이 없고 비효율적인 회사는 그만둬야겠다고.


그다음 날 사수에게 그만두겠다고 얘기했지만 최소 근무기간이 있다고 했다. 없던 얘기인데? 어쨌든 여기서 당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1개월을 더 다니는 거였고, 어차피 그만두는 거 월급은 받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눈치를 다 보며 다녔다. 그 사이 후임도 뽑혔고 사수는 내가 그만두는 게 갑자기 아까운지 영어가 가능했던 나를 그동안 하지도 않던 해외영업에 투입시키기 시작했다.


업무를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었기에 다 들으라는 식으로 해외로 전화해 영어로 떠들면 되는 것이었고 기다린 한 달의 시간이 왔다. 드디어 마지막 출근날이다. 정이 떨어질 만큼 떨어진 그때, 후임을 불러 가르치던 사수는 갑자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만두는 저 전임은 이렇게 알려주면 워드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타이핑해서 가지고 왔어.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배울 생각은 있어?"


그만둘 때 듣는 첫 칭찬이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을 주워 담을 만큼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비교를 해서 사람 자존감 깎아내리는 가스 라이팅은 도대체 왜 하는 거지? 그렇게 마음이 너덜너덜 해진 채 그만두었고 우울증이라는 걸 처음 겪었다. 회사를 다닌 기간만큼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기력이 나의 온몸을 감싸 매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만약 당신이 이 상황에 처해있다면?

《D.P.》 넷플릭스 오리지널


웹툰 D.P. 개의 날을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인 군탈체포조 D.P. 는 입대하는 준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무능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속 두려움에 떨며 여동생을 끌어안달래지만 도망가거나 해결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큰 준호에게 영장이 나온다. 예리한 관찰력 덕분에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고 머리를 길러도 되며 핸드폰 사용도 가능한 D.P.(Deserter Pursuit) 조에 합류한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구청장 아들 박성우와 활동을 나간 첫날 880만 원짜리 위스키가 적힌 메뉴판을 보며 부모 잘 만나 군대를 다 면제받은 성우의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D.P. 의 주된 업무를 하지 않고 탈영병의 서류조차 보지 못한 준호는 찜찜한 마음은 있지만 상사의 명령에 따라 마시라면 마시고 노래 부르라면 부르게 된다.

성우는 아버지 잘못만나 본인만 군대 간게 억울하기만 하다 ⓒ D.P. 넷플릭스


잠시 술을 깨러 나간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다 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라이터를 가지라고 건네준 준호. 그에게 휴가 나오셨냐는 물음에 어영부영 대답한 그의 귓가에 "그럼, 재밌게 놀다 들어가세요."라는 답은 그 이후 메아리쳤다. 그다음 날 그들이 찾아야만 했던 탈영병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저 데려오라는 말에 그들은 술 쳐 먹고 노느라 놓친 것이다.

탈영병에게 자살 도구를 건넨 준호 ⓒ D.P. 넷플릭스

병원에서 만난 여동생과 어머니의 오열에 준호는 죄책감을 느낀다. 여동생은 겨우 과잠바를 입은 대학생이었다. 그는 혼자 폭력 아버지를 견디고 있을 자신의 여동생이 생각났을 것이다. 사 범구는 그냥 데려오라는 명령도 지키지 못한 D.P. 조에게 광분한다. "너네가 죽인 거야, 이 새끼들아." 자살에 사용한 라이터를 받은 준호는 자기가 건넨 라이터로 자살한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 와중 어제 일은 비밀로 하자며 입막음만 하려는 성우에게 격분하게 된다.


"사람이 죽었잖아. 사람이 죽었잖아. 사람이 죽었잖아, 이 미친 새끼야."
- 이병 안준호의 울부짖음


자신들이 찾으려던 탈영병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던 성우의 멱살을 잡고 흠칫 패주게 된다. 그때 성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탈영병의 인적정보를 한번 들여다보지 않았던 안일함, 눈앞에 있었던 탈영병을 못 알아본 잘못, 그리고 그 탈영병의 자살도구가 된 라이터를 건넨 자신에 대한 울화를 쏟아낸다. 결국 그는 성우를 때린 게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죄책감을 느껴며 자기 자신을 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건낸 라이터를 다시 손에 쥔 준호. 그가 흠칫 패주고 싶었던 건 본인이었을 것이다  ⓒ D.P. 넷플릭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릴 적 유도선수였을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만 미술을 가르칠 만큼 섬세한 일병 조석봉이다. 영창에 간 준호가 식음전폐하는 모습에 조용히 초코파이와 만화 캐릭터를 그려 힘을 실어주는 그였다. 헌병 근무 교체 때도 "인간은 희생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 우린 나중에 애들한테 잘해주자."라는 다짐을 전한다.


온순했던 사람이 변했다. "저희도 많이 맞지 않았습니까.."라며 폭력을 행하지 말자는 준호의 말에 "네가 뭘 얼마나 맞았다고. D.P.라서 부대에 쳐있지도 않았으면서.."끊임없는 괴롭힘에 시달린 후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낸 조석봉. 또 도발하는 상사에게 울분을 표출한 그는 탈영을 하고, 지속적으로 괴롭힌 후 제대한 황장수에게 복수하러 간다.


탈영병을 쫒는 일에 경찰이 합류하며 대테러 특수부대까지 총을 꺼내 든 상황에 석봉을 찾으러 간 준호와 호열. "나 괴롭힘 당하고 죽을 거 같을 때 가만히 있다가. 차라리 군대가 바뀔 거라고 얘기하십시오."라며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그는 결국 방아쇠를 당긴다. 군대에서 탈영병 소식을 들은 다른 부대원들은 석봉의 친구를 친구란 이유로 괴롭힌다. 그때,


"뭐라도 해야지."
- 조석봉의 친구 김루리 일병


뭐라도 해야지 바뀌는 세상일까? 뭐라도 한 건 사람이 죽어도 눈 깜짝하지 않고 본인의 잘못만 덮으려던 성우를 두들겨 팬 준호부터 시작된 것이다. 끊임없이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애들한테 잘해주자는 다짐을 한 석봉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악습이 대물림되지 않고 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뀌어야 한다.


유도선수였던 석봉이 나설 수 있었으면 충분히 반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 마음먹으며 자신이 바뀌는 선택을 한 것이다. 뭐라도 하는 것은 이런 점이다. 문화가 바뀌려면 악습을 끊고 나부터 그러지 말자는 다짐에서부터이다.

많이 맞은 걸 끊는 방법은 우리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 D.P. 넷플릭스, 유튜브 소개해주는남자



과연 바뀌는 게 있을까?


전에 다니던 증권회사는 바뀌었을까? 잡플래닛을 보면 십 년이 지난 지금 바뀌지 않았다. 출근버스에서 이 버스가 대교밖에 떨어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매일 나를 뒤덮었다. 현실은 변하지 않을 테고 나하나 없어지는 게 이들이 바라는 바일 지도 모르니깐. 그들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테니깐.


죽인다고 복수가 아니다. 사람이 죽을 때 되면 반성할 거 같냐? 그냥 그러고 죽는 거야. 죽인 사람은? 그때 가서 후회하지. '뒈진 새끼는 아무것도 반성 안 했는데. 이젠 책임이고 나발이고 물 수가 없네, 이거, 씨발'

그러면서 평생 후회한다. 살려 둘걸. 살려 두고 책임지게 할걸.
- 박범구 중사


군대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보여준 《D.P.》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도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강압적인 상명하복, 까라면 뭐든 까야하는 불편한 진실, 괴롭힘이 대물림되어 똑같이 하지 않는 게 이상한 문화인 또 다른 세계. 군대를 가보지 않는 여자인 내가 이렇게 감상을 남기는 것 조차 외람될  있으며 남들 다 하는 회사생활이 힘들었다고 말하는 게 투정 일지 모른다.


하지만 6.25 때 쓰던 수통도 바꿔주질 않는 군대가 어떻게 바뀌겠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차라리 나하나 죽는 게 더 빠를 거 같은 개탄한 현실이 반영된 사항일 것이다. 시즌 1 마지막의 준호는 다들 우향우 하며 이동할 때 사색에 잡혀 가만있다 혼자 반대로 뛰어간다. 준호는 바뀌지 않는 현실 개인적 불복종 운동으로 저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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