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아버지는 스마트폰을 바꾸고 나서, 며칠째 지문인식이 되지 않는다며 불평하셨다.
“이거 손가락이 늙어서 그런가? 계속 안 되네.”
웃으며 넘기기엔,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기술이 인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그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존재의 부정처럼 느껴졌다.
지문인식은 편리함의 상징이다.
비밀번호를 기억할 필요도, 복잡한 인증 절차도 없다.
하지만 그 기술이 ‘젊고 매끄러운 손가락’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노년층의 지문은 세월에 닳고, 피부는 건조해진다.
그래서 인식률이 떨어진다.
은행, 관공서, 공항의 기계들은 이런 손가락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라며 냉정하게 거부한다.
기계는 정확하지만, 정확함이 언제나 공정한 건 아니다.
며칠 전 관공서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
한 할머니가 손끝에 침을 묻히며 말한다.
“이제 되려나?”
하지만 단말기는 여전히 빨간불을 깜박였다.
직원이 대신 손가락을 잡아주며 “조금만 더 눌러보세요”라고 했지만,
결국 인증은 실패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 손이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봐.”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기술의 발전이 나이를 먹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있지만,
사람은 여전히 나이를 먹고, 손끝의 세월은 기록된다.
젊은 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얼굴인식 쓰면 되잖아’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 ‘그냥’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스마트폰 잠금을 풀기 위해, 은행 업무 하나 보려고
몇 번을 실패하고, 몇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기술은 ‘편리함’이 아니라 ‘검증 시험’에 가깝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기술은 인간을 돕는 도구일까,
아니면 인간이 기술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시대가 된 걸까.
아버지는 결국 비밀번호 인증으로 바꾸셨다.
“이게 나한테는 편하지.”
그 말이 이상하게 뿌듯했다.
기술이 인간을 인정하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
언젠가 이 세대의 지문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쯤,
그들의 손끝이 남긴 온기를 기억할 수 있을까.
기술이 그 온도를 담을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스마트한 세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