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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예쁜 정원

인생의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곳

by 허니베리 Mar 16. 2025

 


  거울을 보니 얼굴에 전에 없던 거무스름한 얼룩이 피어나고, 올록볼록 요철도 생겼다. 뿐만 아니다. 볼 옆과 미간에 팔자(八字) 주름도 부쩍 깊어지고, 이마에는 새롭게 삼자(字)가 새겨졌다. 매끄럽고 반짝반짝 빛나던 피부가 언제 이렇게 된 거지? 거울 속 내 모습과 머릿속 자아상의 괴리감을 느끼며 '마음은 여전히 이팔청춘인데'를 읊조리시는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변화한 것은 겉모습뿐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늦깎이 육아에 친정과 시댁 살피느라 몸과 마음의 영양분과 수분도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작은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 날도 있다. 그럴 때면 태아처럼 안전한 곳에서 하염없이 웅크린 채 있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 손이 필요한 어린 아들, 나날이 노쇠해지시는 부모님, 직장에서 점점 커지는 책임감이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다. 언제쯤 나는 나를 돌보고 가꿀 수 있나. 청춘의 꽃잎은 한 장 한 장 다 떨어져 버렸는데.


 컬이 풀려서 축축 늘어진 머리카락이라도 정리하면 기분이라도 산뜻해질까? 이참에 덥수룩하게 자란 아들 녀석 머리도 다듬어줄 겸 집 근처 평이 좋은 미용실을 검색하고 예약했다.


 미용실로 가기 위해 지도를 살펴보는데 길치인 나는 도무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아들이 지도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기를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용실 앞에 도착했다. 내가 얼른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자, 아들이 큰 소리로 불렀다.

 “엄마, 잠시 멈춰보세요. 무작정 올라가시면 어떻게 해요. 맞는지 확인하셔야지요!”

 “입구에 있는 간판 보고 올라온 거야. 너도 얼른 올라와!”

 “엄마, 내려와 보세요. 거기 아닌 것 같아요.”

 아래로 내려가 보니 내가 뛰어 올라갔던 계단 바로 옆에 예약한 미용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행동에 머쓱하면서도 벌써 이렇게 자라서 나를 돕는 아들이 대견했다.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던 아이는 작년 말부터 슬슬 외모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며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다. '앞머리에 살짝 웨이브 넣어 옆으로 넘기면 멋있어진다'는 원장님 말에 홀딱 넘어간 아들은 머리에 로드를 말고 싱글싱글 웃음까지 지으며 거울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아기 때부터 할머니 따라다니던 시장 미용실 원장님과의 의리 때문에 다른 미용실에 가는 것을 배신으로 여기고 거부하던, 게다가 파마의 ‘ㅍ’만 나와도 질색하던 녀석이 말이다.


 나는 시원하게 머리를 자르고, 아들은 멋들어지게 머리를 말고 미용실을 나왔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온다는 아이를 뒤로한 채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이 도서관 문 닫는 시간까지 40여 분 남았다. 홀로 있는 시간, 물론 저녁 준비를 해야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점차 길어지겠지. 어젯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열 시 반. 그저 씻고 자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한데 아이가 내 몸에 매달리며 재잘재잘 말을 걸어왔다. 아이는 그 시간까지 나를 기다렸을 텐데 그 마음을 알면서도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아이를 밀어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아이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곧 찾아올 텐데.


 도서관에서 돌아온 아이가 검은 포도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자기가 읽은 책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는, 어젯밤 아이가 잠자리로 쫓겨나는 바람에 내게 말해주려다 만 ‘이원재 박사님’에 관해서도 물었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맑고 높은 아들의 목소리가 마치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았다. 그때, 아이의 파마 소식을 들으신 엄마가 손주의 변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으셔서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엄마의 목에 내가 사드린 자줏빛, 분홍빛 꽃이 화사하게 수 놓인 스카프가 둘려 있었다. 스카프 위에 흐드러지게 펼쳐진 꽃을 감상하고 있는데 귀여운 새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꽃이 가득하고 새가 노래하는 우리 집. 어디선가 살랑살랑 이는 따뜻한 봄바람에 꽃향기도 실려 오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이 이렇게 예쁜 정원이었구나.


 나의 거칠어진 피부, 굵어진 손마디, 구부정해진 어깨와 허리를 살펴보았다. 한숨 대신 미소가 지어졌다. 정원 가꾸는데 피부가 상하고, 몸이 좀 굽을 수도 있지, 뭐. 대신 내가 뿌린 씨앗들이 아름답게 꽃 피우며 열매 맺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를 얻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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