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협곡을 걷는 사람들: 췌장암 트레일

01. 프롤로그

by 허니베리


긴 연휴를 앞두고 아버지에게서 뜻밖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이란다. 동행해 주지 않으련?'

간략한 내용 아래에 그려진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언덕 위 지명이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었다.

'Diabetes Hill, 당뇨 언덕.'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언덕 주변을 오가며 능선을 살펴보셨다지만, 나에게는 낯선 장소였다. 완만한 언덕일 거라 추측하며 길을 나섰으나 초입부터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암벽이 버티고 서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 것일까.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팔순의 아버지가 암벽에 매달려 계셨다.


아버지를 혼자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는 거친 바위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버지의 등을 받쳐드리며 아버지를 따라 올라갔다.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행히 암벽 중턱에 삼면이 유리 벽인 응급 초소가 있었다. 아버지가 타는 듯한 갈증을 호소하자, 흰옷 입은 트레일 관리인들이 투명한 액체가 담긴 펌프를 들고 달려왔다. 나는 아버지의 침상 옆 간이 의자에 앉아 밤을 꼬박 지새웠다.


안개 때문인지, 아침이 온 줄도 몰랐다.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음 코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 공기를 마시는 기쁨도 잠시, 눈앞에 거대한 산맥이 펼쳐졌다. 관리인이 설명서를 읽듯 말했다.

Pancreatic Cancer, 췌장암 협곡입니다.

TV 화면을 통해서나 보던 등반이었다. 그런 내가 한 번 발을 디디면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소문이 파다한 이곳에 발을 디뎠다.


관리인이 이어 말했다. 그의 곁에는 날카로운 손이 여러 개 달린 로봇이 서 있었다.

“이 길은 도마뱀처럼 머리, 몸통, 꼬리 모양입니다. 그중 두부는 길이 복잡해서 로봇의 도움으로도 길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체부로 진입하셨군요. 여기에서 연결되는 트레일은 완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트레일은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가 걸리는 '항암'이라 부르는 코스들로 연결되어 있다. 관리인의 손에 들린 칼로 병든 부위를 도려내야만 하는 구간도 있다.


우리는 등산에 필요한 용품을 가져올 방법을 찾았다. 부모님 배낭은 진작에 처분하셔서 나의 장바구니라도 써야 할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 길을 찾고, 식량을 구하며, 불침번을 서야 했다.

"엄마는 무릎도 불편하신데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너는 자식 돌보며 일도 해야 하지 않니. 내가 여기 남는 게 맞아."

엄마와 나는 안쓰러운 손길로 서로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출발했다. 나뭇잎끼리 스치며 서걱거리는 소리에도, 우리를 보고 후다닥 달아나는 작은 산짐승 모습에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첫 코스를 통과했다. 대피소로 들어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숨과 느릿한 움직임이 대피소의 찬 기운을 깼다. 짐을 풀고 자리에 눕자, 크고 작은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입천장이 헐고 입맛도 잃었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이 트레일을 완주할 수 있을까. 완주하더라도, 언젠가 미지의 협곡을 향해 결국은 떠나야만 하는데.


은은히 퍼지는 숲 내음을 맡으며 지난 여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처진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이며 서로를 대견해하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도 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 안에 타오르는 생명이 어두운 숲길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산하게만 여겨지던 트레일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나무들, 고도마다 다른 향기를 뿜는 꽃들, 목을 축이고 목덜미를 씻을 수 있는 시냇물.


우리는 푹 떨궜던 고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괜찮다, 고맙다.'

그 말들이 고난으로 정제된 얼굴 안에 담겨있었다.










이미지 출처: Freepik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