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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에 속지 말아요

02. 첫 외래 진료

by 허니베리


멀리서 부모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하얀색 점퍼에 새 운동화를 신으셨고, 엄마는 연둣빛 실크 스카프를 두르셨다. 어버이날에 드린 선물이었다. 두 분의 등장에 잔뜩 흐린 하늘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새 옷을 입혔을 때처럼, 두 분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병원이 아니라 나들이 가는 기분이에요. 진료 보신 뒤,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한 달 전, 아버지는 급성 당뇨로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약과 인슐린 주사로 혈당을 조절하며 기력도 되찾고 계셨다. 오늘은 퇴원 이후 첫 외래진료 날이었다.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 의사 등 뒤 창밖으로 연녹색 잎을 잔뜩 달고 선 어린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병동에서 뵙던 그 의사를 진료실에서 다시 만나니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식사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소화는 잘되시고요?”

“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소화도 문제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대답과는 달리 의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환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모습을 지켜보는 내 미간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당 조절이 잘되시네요. 인슐린 주사 투여 횟수를 줄여 당뇨약으로 대체해 보겠습니다.”

불길하던 예감이 무색하게, 예상보다 좋은 소식이었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의사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보시다시피 심장에 석회질이 많이 끼어있어요. 시술하실 수도, 약물로도 치료하실 수도 있는데.... 일단 췌장 검사 결과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심장, 췌장 담당 선생님들은 다음 주 월요일에 뵙기로 예약이 잡혀있군요. 저희는 한 달 뒤에 뵐게요.”


얼마 전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은 시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약물로도 치료 가능할 수 있다니, 얼마나 운이 좋으신지.


아버지를 향해 싱긋 고는 의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우리를 바라보는 의사의 표정이 아련했다. 봄볕에 스르르 녹는 눈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서는데 의사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따님은 잠시 이야기 나누시지요.”


순식간에 진료실 안이 차갑고 어색한 공기로 채워졌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진료실 문 손잡이를 잡으신 채 온몸이 굳은 듯 멈춰 서셨다. 어떤 험한 소식이 들려와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던 80세 어르신이 아닌, 커다란 야생 짐승 앞에서 잔뜩 겁먹은 여덟 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향해 이번에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시고 나가 계세요. 별일 아닐 거예요.’

아버지가 뻘밭을 걷듯 무겁고 느린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가셨다.


의사가 의자로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작고 낮은 의자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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