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재투성이의 자리
여의도를 바라보며 달리는 강변북로의 밤.
고층 빌딩을 장식한 수직의 붉은빛이 밤하늘을 뻗어 올라가고, 수천 개의 창을 뚫고 쏟아지는 금과 은, 호박과 에메랄드빛이 검은 강 위에 너울진다. 옛 왕국과 미래 도시가 섞인 듯 몽환적이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시는 거죠?”
택시 기사님의 질문에 어둠으로 둘러싸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회색 병원 건물이 떠올랐다.
5차 항암 치료를 한 주 앞두고, 오늘 밤 아버지께서 또다시 응급실에 입원하셨다. 밤샘 간병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제는 모처럼 아버지의 컨디션이 좋았다. 아침에는 죽 한 그릇을 다 드셨고, 목소리도 쾌활했다.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집에서 가까운 계곡에 다녀오자고 갑작스럽게 제안했다. 그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웠다. 부모님께서는 머뭇거리시면서도 말끔하게 단장하시고 나오셨다.
남편의 말대로 계곡은 시원했다. 하지만 능이오리백숙을 먹자, 뜨거운 여름을 삼킨 것같이 열기가 올라왔다. 아버지께서 식탁 쪽으로 몸을 기대시며 길게 숨을 내쉬셨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예상됩니다.”
차창 밖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저녁에 이어 밤에도 안부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너는 걱정이 너무 많다며 허허 웃으셨다. 그렇게 웃으시던 아버지께서 다음 날 아침부터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 소식에 일을 마치자마자 친정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서는 자리에 미동도 없이 누워계셨다. 구릿빛이던 얼굴이 희고 창백했다. 아버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확인하고서 그 옆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더운 날 밖에 모시고 나간 건 무리였어. 소파에 놓인 쿠션을 꽉 움켜잡았다. 손톱 끝이 하얗게 변했다.
아버지를 위해 한가득 상을 차렸다. 그중 하나라도 아버지 입맛에 맞는 게 있다면 나머지 음식들이 버려진다 해도 아깝지 않을 터였다. 간신히 식탁 앞에 앉으신 아버지는 내미는 반찬마다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고개를 저으셨다.
어린아이를 먹이는 것처럼 김에 밥을 손톱만큼 얹어 돌돌 말았다. 그것을 입에 넣어드리자, 대여섯 조각 드셨다. 곡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갔으니, 힘을 내실 거야.
잠시 뒤, 집안에 퍼지는 악취는 그 생각을 무참히 깨뜨렸다. 체온계는 초록색이 아닌 주황빛으로 깜빡였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엄마와 눈짓을 나누고 조용히 입원을 위한 짐을 챙겼다.
그러나 한 시간 뒤에 다행히도 아버지의 체온이 정상 수치로 내려갔다. 설사도 멎어서 응급실에서 받아주지 않을 듯했다. 부모님 댁에 잠시 더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급하게 신발을 다시 신으며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외치셨다.
“체온계가 빨간색이야!”
아이의 등을 떠밀듯 차에 태워 부모님을 모시고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지는 꼿꼿함을 유지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가신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두어 시간 동안 근처 복도에서 기다렸다. 아이는 내 볼에 살짝 입도 맞추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들려주며 나를 살펴주었다.
눈이 반쯤 감긴 아이와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와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옅은 술냄새에,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같은 날, 술을 마셔야 했어?”
나의 갈라진 목소리가 우리 집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기를 흔들었다.
샤워를 했지만, 간이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울 엄마 생각으로 침대에 편히 누울 수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병원에 다녀올게."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편이 말했다.
“택시 부를게. 조금 있다가 나가.”
대답 없이 가방을 챙기는 나를 향해 그가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 뿐 아니라 서운함도 녹아있었다. 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앞을 그대로 지나쳐 밖으로 나섰다.
택시에 타고 핸드폰을 꺼냈다. 남편에게서 온 긴 메시지를 읽는 대신, 부재중 전화가 왔는지 확인했다.
몇 시간 전 전화를 걸었던 오빠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병원이라는 카톡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응급실 앞에서 엄마를 만났다. 수문장 교대식처럼 둘만의 언어로 서로를 염려하는 사인을 보냈다.
“새벽 일찍 올게.”
“제가 워낙 밤잠 없잖아요. 염려 마시고 눈 좀 붙이시고 오세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응급실은 처음 찾았던 때보다 작고 낡아 보였다. 누렇게 때 탄 벽지, 긁힌 바닥, 벗겨진 가구 모서리. 찬란한 밤을 누리고 있을 이들은 결코 보지 못할 자국들이었다.
때론,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그 익숙함이 재투성이 자리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