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10대 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 고1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E. 고등학교 때 부터 베프로 지내다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쭈욱 인연을 맺어오던 유일한 친구. 나는 고2 때 자퇴를 했기 때문에, 이후에 꾸준히 연락하던 고등학교 때 친구가 E 말고는 없었다.
E는 내게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친구였다. 늘 서툴고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던 나를 챙겨주었던... 예를들어 신발끈을 묶어 준다던지, 필기를 빌려준다던지, 목도리를 나 대신 예쁘게 매어 준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친구 E의 섬세한 터치를 받고 나면 나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던 때라, 친구 E의 손길은 내게 언니 같고 또 엄마 같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E에게 알게모르게 많이 기댔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나는 E에게 기대어 E의 세심한 손길을 받으며 성장했다. 자기 집안에서 K-장녀로 태어난 E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챙겨주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에, 내게도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챙겨준 것 같다. E는 너무 착했고 욕을 뱉는 것도, 나쁜 말을 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워하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는 아주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정반대의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나는 아주 거칠고 잔혹한 마음들을 속에 품고 있었고 반대로 친구 E는 아주 폭신하고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는 종종 E에게 나의 거칠고 잔혹한 마음들을 내비쳤다. 아마 고등학교때부터 조금씩 삐죽삐죽 그렇게 튀어나왔을것이다. E는 그럴 때 마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삐뚤빼뚤한 내 마음들을 친구 E에게 불시에 드러내고 터뜨리게 되는 적이 많았고. 우리 사이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나는 유학을 갔다. 유학에 가서 친구 E와 밤낮없이 연락을 했는데. 나는 자주 친구에게 불평 불만을 하며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예: 죽겠다거나, 너는 내가 죽어도 모를거야 라거나 하는 말들). E가 답장이 10분이라도 늦으면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못됀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사과를 했고, 또 이틀 지나고는 다시 친구를 악마취급을 하면서 몰아세우고, 그 다음날 다시 사과를 했고.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 제발.. 친구로 있어달라... 하며 이 짓을 1년 동안 수없이 반복했다.
친구는 때때로 정말 크게 결심한 듯 내 연락을 씹거나 조용히 화를 내기도 했는데, 나는 계속 친구에게 전화를 100통씩 걸고, 카톡을 300통 이상 보내면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엔 이게 내 병의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당시 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 밖에 방법을 몰랐기에 친구를 수없이 비난하고 떠나지 말아달라 매달리는 것을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먼저 친구를 밀어뜨려놓고 시간이 지나면 버림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빌고 화내고 빌고 다시 화내기를 반복.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E를 두어 번 정도 만났지만, E는 이미 마음이 많이 다쳐있는 상태였고, 몇 번의 연락 끝에 결국 영영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친구는 내게 말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었나? 싶어.. 널 보면 말이야" 그리고 E네 집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인사하던 날, 친구는 내 버스를 같이 기다려 주면서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친구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고등학교 무렵, 손재주가 좋은 E가 내게 손수 편지에 그림을 그리고 내용을 써서 내게 준 적이 있다. E는 천사날개가 그려진 그림 위에, ㅇㅇ친구가 되자! 라고 글을 썼고, ㅇㅇ이 무엇인지 맞춰보라며 퀴즈를 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그 단어가 무엇인지 생각해 낼 수 없었고, E는 웃으며 “오랜 친구가 되자” 라고 말했다. E는 종종 내게 우리는 왠지 80살 먹은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 같이 친하게 지내면서 웃을 것 같아! 하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는 E가 고맙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과연? 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오랜... 오랜 친구가 되자고 했던 E였는데.... 나는 E를 실망시켰고, 상처입혔고, 또 정체성의 혼란마저 오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만남 때, E가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걸 보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하지만 나는 친구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앞으로도 친구에게 계속 잘해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내 병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와 관계가 끊어지고, 나에겐 큰 변화가 있었다. 유년시절을 함께한 E와의 관계 단절은... 내게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온통 E와의 추억들밖에 나는 없는데, E와 함께했던 10대 시절이 내 유일한 추억거리였는데. E가 사라지자, 마치 나의 10대며 20대 초반이 통째로 날라가버린 것만 같았다. 정말 너무 아팠다. 그 시절을 함께해주었던 친구와의 이별은.. 더구나 그 이별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도.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상담센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E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계기로, 무언가 내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E와의 이별에 대한 충격으로 상담센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