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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작가 Sep 27. 2023

버킷리스트

마음이 아무는 이야기 - 상담 후 단상

어느 피로한 날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삐약쌤* 병원까지 가려고 택시를 덜컥 잡아 탔다. 평소 택시를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이 날 만큼은 어쩔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택시에 타고 나니, 택시 운전기사님이 뭐라고 뭐라고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한 복지기관으로 택시를 불렀기에, 기사님은 날더러 공무원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까 그 건물은 복지시설이고 저는 사회복지사에요. 하고 말했다.      


기사님은 갑자기 번뜩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아! 잘됐다, 복지사님이라고 하니까 제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네요~” 나는 순간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해졌다.   

   

기사님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뭐시기.. 뭐냐.. 존엄사? 안락사? 같은 거 말이죠... 복지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솔직히 병들고 늙어서 고통받으면 안락사는 시켜줘야 한다고 봐요”      


이 말에 나 또한 평소 관심 있던 주제였기에 나의 의견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달 전만 해도 스위스의 조력사망이나 디그니티스 단체 등을 많이 검색해보았기 때문이다.      


기사님의 의견처럼, 나도 인간이 죽기 직전의 고통에 처하면 스스로 고통을 끊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물 흐르듯 졸졸졸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님이 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복지사님은 버킷리스트 없어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버킷.. 버킷.. 리스트라... 솔직하게 나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기사님은 나중에 죽기 전에 한 번쯤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오묘한 정적이 흐르는동안, 기사님은 택시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기사님의 흥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버킷리스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무언가 100일 후, 10년 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미리 정해놓는다는 것이 내 삶에는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데. 그러한 재미난 미래와 욕구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겁이 나기도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즐거운 것을 상상만으로 정해놓는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내가 당장 죽을 수 없을까봐. 더 살고 싶어질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올해 말에 책을 내기로 결심하고서 이미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가 있는 삶. 의지와 의욕이 넘치는 삶. 재미난 상상으로 가득한 삶 말이다. 연말에 책을 내는 계획을 세운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흥분되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8월인 지금도 역시나 무수한 위기가 있지만, 이 책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생에 책 한 권을 출간하는 일이 나에게는 오랜 버킷리스트가 아니었을까? 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이미 나에게는 버킷리스트가 딱 하나 있었고, 그것을 향해서 아등바등 삶을 지켜내 달려온 것이 아니었는지.   

   



보통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죽을 생각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버킷리스트란 어쩌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버킷리스트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특별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장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밥을 먹는 것, 또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여 커리어를 쌓는 것, 또 나에게는 살아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말을 책으로 엮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택시 기사님께 버킷리스트가 없다고 말한 나조차도, 단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던 것처럼. 결국 각자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있어야 삶을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병원 정신과 의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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