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화, 사람, 합방

보령 김좌진 장군 묘

개화, 사람, 합방은 한반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조선 말기의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추진되던 개화(開化)는 주역에서의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가져온 것으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궁구(窮究), 경영하여 일신(日新)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MG0A1270_resize.JPG

1853∼1860년대에 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유홍기(劉鴻基) 등에 의해 형성되고 1870년경부터 북촌의 양반 자제들 중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등에 이어지고 1882년 임오군란 후 청나라가 조선을 속방국으로 만들려 하자 이에 대항하고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리고 갑신정변은 실패를 한다.

MG0A1271_resize.JPG

그로부터 5년 후인 1889년에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에 개화사상은 1896∼1898년 독립협회에 의해 계승되어 한 단계 더 발전해 전개되었지만 개혁 정책의 정립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고 조선은 변할 수 있는 적기를 놓쳤다. 한국사에서 배울 때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를 제외하고 생각 외로 알려진 것이 많지가 않다.

MG0A1279_resize.JPG

개화사상의 영향은 김좌진에게도 이어졌는데 1896년 김석범(金錫範)이라는 청년이 김좌진이 사는 고향마을에 찾아왔는데 그는 개화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김좌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이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을 때 분노하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군대를 개편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총사령관에 취임하게 된다.

MG0A1285_resize.JPG

김좌진 장군의 묘가 있는 곳에도 수많은 낙엽들이 떨어지며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김좌진 장군 사당과 외삼문은 항상 열려 있다. 일제 강점기를 만든 것은 일본 사람이지만 그 길까지 가게 만든 것은 한반도의 사람이었다. 일본과 조선의 역사의 불균형은 현대 세계에까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먼저 개화하고 체계를 받아들인 일본은 그런 효율적이면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기를 갖지 못한 조선을 합방하고 강점했다. 그러한 격차는 이 땅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외부에서만 찾으려 하기에 불투명하고 캐캐 묵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MG0A1288_resize.JPG

북만주에 터를 잡고 김좌진 장군은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운평 숲 속에서 매복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동해 천수평(泉水坪)에 주둔한 일본군과 맞붙었다. 이때에도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어랑촌 전방에서는 독립군이 일본군 3개 여단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다가 홍범도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공동으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홍범도 부대와 함께 연합전선을 편 것으로, ‘청산리대첩’이라는 이름으로 만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접전을 벌인 끝에 독립군 희생자는 100여 명에 달했지만 일본군 2천여 명을 살상했다.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0년 1월 24일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고 서부면 이호리(梨湖里)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 정월에 지금의 묘지인 보령시 청소면에 이장되었다.




keyword
이전 18화화암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