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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황소서(檄黃巢書)

보령 최고운 유적의 주인공

글 하나로 중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신라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명문으로 최치원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글인 토황소격문을 쓴 것이다.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를 하고 당나라 희종의 연호(880-881) 재위는 873-888에 벼슬길을 했던 최치원은 당나라 희종 광명 2년에 유적인 황소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고변을 제도행영도통을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그의 막하에서 고변을 대신하여 7월 8일에 '격황소서'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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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상화원이 있는 죽도로 가는 길목에 최고운 유적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방파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섬이었던 맥섬이 있던 곳에 경치가 너무 좋아 최치원이 자주 갔던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 자신의 글을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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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 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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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남겨진 최치원의 흔적을 생각보다 많이 본 사람으로 그의 글이 어떤 흐름과 힘을 가졌는지 보게 된다. 문경에도 사천에도 홍성, 보령, 포천, 부산 등 경치가 좋다는 곳에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서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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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씨 시조(始祖) 12세에 당나라에 가서 유학. '황소의 난' 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격문을 써서 글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28세(885)에 귀국, 진성왕 8년(894)에 '아찬' 벼슬을 받았으나 곧 사퇴하고 은퇴한다. 중앙귀족의 반발과 함께 6두품 출신의 신분적 한계로 인해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세상을 방랑하듯이 흘러 다니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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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에 이곳에 오면 그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지금은 주변에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마치 서산의 간월암과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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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지만 최치원이 바위에 새겨둔 글들이 남아 있지만 세월의 풍파로 흐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최치원은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렀으며, 유교의 성인들을 모신 문묘에 배향되었다. 살았을 때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후세의 사람들과 선비들은 모두 그의 글을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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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명필들과 지식인들은 왜 좋은 풍광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을까. 좋은 것을 보는 만큼 생각이 열리고 정체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글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아닌 것 같더라도 논리가 바탕이 되는 설득력이 있는 글을 읽으면 반박이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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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강수(强首), 설총(薛聰)과 더불어 '신라 3 문장'(新羅 三文章)의 한 분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894년(진성여왕 8)에는 최치원이 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왕에게 올렸지만 기득권의 반대로 무산되자 떠나는데 그로부터 41년 후인 935년(경순왕 9)에 통일신라는 고려에 자진 항복하며 멸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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