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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4. 2019

당포성지

통영의 왜구를 방어했던 요충지

일본은 참 오래전부터 척박했던 땅인 모양이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임진왜란 전까지 소규모로 한반도로 찾아와 약탈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특히 남해는 침략을 받은 곳이 많이 있다. 왜구들과 달리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정주형 식량 생산자의 생활을 일찍이 시작을 했다. 사실 식량 생산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발견'된 것도 아니었고 '발명'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섬에서 대륙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은 임진왜란 때 부 터지만 그 전에는 식량 등을 얻기 위해 한반도를 침범했다. 왜구들은 정주하는 것 대신 채집형 사냥꾼의 생활을 했을까.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농경민들은 언제나 수렵 채집민들을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경멸했고 수렵채집민들은 농경민들을 무지하다면서 경멸했다. 

일본이 한국을 옛 기록에서 어떻게 언급하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역사에서 일본인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멸시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보통 왜구라고 많이 불렀다. 

통영의 바다를 보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당포성지가 나온다. 당포성의 특징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2단의 기단을 형성하는 고려·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축 진성(石築鎭城)이며 평산성(平山城)으로 삼덕리의 야산 정상부와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남쪽 방향으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최영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왜구를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충청남도의 홍산이라는 지역에서도 물리쳤고 이곳 통영에서도  고려 공민왕 23년(1371)에 최영(崔瑩)이 많은 병사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고 왜구를 물리쳤다. 그 성이 당포성이다. 당포성은 이순신이 통제영이 한산도에 있을 때 왜구를 물리치고 당포해전의 승리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남아 있는 석축의 길이는 752m, 최고 높이 2.7m, 너비 4.5m로 통제영이 이곳을 요충지로 사용할 때 만호(萬戶 : 武班 從四品의 벼슬)가 이곳을 관장하였다.  동서 북쪽의 문루지는 잘 남아 있으며 문지에는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있는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당포성을 살펴보기 위해 위쪽으로 걸어서 올라가 본다. 

어떤 국가가 확산을 통하여 다른 사회로부터 기술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사회가 처한 지리적 입지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왜구들은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보다 다른 사회로부터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당포성의 앞바다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일본에는 강력한 무기인 조총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43년에 처음 화승총을 가지고 포르투갈 모험가가 상륙한 것이다. 그 신무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총기를 생산하여 우수한 총을 가지고 임진왜란 때 사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사무라이 계급들의 반발로 일본은 총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고립 속의 안전을 추구하다가 1853년에 미군 함대의 강력함에 다시 신무기를 만들게 된다. 

당포해전에서는 거북선의 맹활약으로 손쉽게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에 진을 친 적군의 압도적 전력에 술렁이는 부하들에게 싸움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주문하면서 “죽지 마라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라는 말을 하며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당포성은 통영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나무하고 물을 긷노라니 피난하여 산에 올랐던 그 섬의 목자(牧子) 김천손(金千孫) 이 신 등의 배를 바라다보고 급히 달려와서 고하기를 적선 대, 중, 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하오 2시쯤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 고성 땅 견내량에 대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당포성지는 일본과 참 많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최영 장군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성을 쌓았고 임진왜란 당시 쳐들어온 일본군을 막았던 곳이기도 하다.  왜구가 고려에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었다. 최영 장군이 격퇴한 왜구가 이같이 창궐한 것은 1333~92년에 일본의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란이 지속되어서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 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기존에 해안 지역에 설치된 수소(戍所)를 증설한 데 이어 산성(山城)·읍성(邑城) 등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화포(火砲)를 개발함으로써 왜구 격퇴에 상당한 성과를 것도 동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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