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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곰탕

고을의 모양이 한양과 흡사한 나주의 맛

by 나는 누군가 Feb 21. 2022

조선시대에 전라남도의 큰 도시는 광주와 나주를 꼽았었다.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도회지로 고을의 형태가 한양과 흡사하고 옛날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많은 관리들이 나주로 발령을 나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이는 나주가 옛날부터 풍족한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 진미를 먹을 수 있어서 앞다투어 내려왔다는 소리도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해지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발전하는 것들이 있다. 음식문화가 발전하고 예술과 각종 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소고기를 먹는 것은 엄격하게 규정했던 조선에서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자주 먹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캐비어를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나주가 본격적으로 성장을 한 것은 태조 왕건 때다. 견훤과 이곳에서 공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나주지역의 호족의 힘을 빌리기 위해 왕건은 나주 오 씨(장화왕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고려 현종 때 8목으로 개편되었을 때도 유일하게 나주만 목으로 남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완전한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각 지방마다 호족의 자치에 맡겨지고 있었는데 중앙집권화 정책이 있었으나 지방의 세력들은 꾸준하게 유지된 측면이 있다. 고려초를 생각하면 지금의 미국의 합중국을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권한은 중요 거점을 다스리는 호족에게 있었고 일부 중앙군이 정부를 유지하는 형태였다. 

나주 성곽을 보아도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볼 수 있는데 주변에 농경지가 정말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주는 영산강이 관통하는 나주평야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나주에 고대국가가 있었다는 것은 영상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된 대형 옹관 고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변에 물어보면 나주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도 곳곳에 볼거리나 이야기가 넘쳐나는데 옛날이야기로 치부하니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나주는 조선 후기에도 영장이 관할하는 호남 우영의 소재리로서 지방 군사의 중심지였다. 

옛날에 사용했던 우물도 지금 남겨져 있다. 

금성별곡 제1장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   

錦城山 錦城浦 亘古流峙   

爲 鍾秀人才 景幾何如    

千年勝地 民安物阜  (再唱) 

爲 佳氣 籠 景幾何如


"바다의 동쪽인 해동·湖의 남쪽인 호남의, 나주는 큰 목사가 다스리는 고을로,  錦城山이 우뚝 솟고·錦城浦로 흘러가는 물과 함께 영원히 변함없는 산천이로다.  아! 빼어난 재주 있고 놀라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아득한 옛날부터 경치 좋고 이름난 곳,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은 물산이 풍성함이니, 아! 아름다운 서기가 푸르고도 성한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이제 나주와 관련한 역사이야기는 뒤로 하고 먹을거리를 찾아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나주곰탕은 예로부터 유명한 음식이다. 조선시대에 소를 잘못 잡았다가는 치도곤을 맞았다. 이 음식점의 역사는 100년을 넘었다. 대도시에도 나주곰탕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도 있지만 이 음식점의 곰탕 맛과 비교가 할 수가 없다. 

옛날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갈 정도로 귀한 음식이 나주곰탕이다. 대구에 가도 곰탕이 있는데 현풍곰탕이라고 부르고 나주곰탕과 맛의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맑은데 진하고 진하면서도 깔끔한 것이 나주곰탕의 특징이다. 한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무언가 미안해지는 느낌의 음식이다. 

113년의 역사를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나주지역에 내려오는 곰탕의 역사와 함께 좋은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주장은 전남에서 큰 장날이었는데 그때마다 주막을 찾아가서 한 그릇 내어달라는 보부상부터 과거를 보려고 올라가던 선비들의 배를 채웠던 나주곰탕의 맛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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