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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야경과 곰탕

밝게 보이는 풍경과 맑게 보이는 맛과의 조화

by 나는 누군가 Apr 02. 2024

얼마 전 KBS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막을 내렸다. 국가의 운명을 다루었던 고려의 500년 사에서 큰 위기였던 거란의 침공은 고려에 많은 변화를 만들었다. 경종이 죽자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숙부였던 안종 욱과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많지가 않았다. 목종 6년(1003)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가 천추태후에 의해 한때 강제로 중이 되어 출가 생활을 하기도 했던 아이를 훗날 나주로 여정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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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생활하던 아이는 궁궐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 되자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며 이때 그의 나이 18세에 불과했는데 그가 바로 훗날 현종이라고 부르는 고려왕이다. 사찰에서 살면서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던 현종은 백성을 사랑했던 왕이었다. 그렇지만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개경을 떠나 20일이 채 되지 않은 일정에 이곳 나주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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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나주의 읍성으로 들어가던 옛 문루가 나온다. 야경이 있어서 밝게 보이는 문이 옛 나주의 영화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힘들게 나주에 들어서는 순간, 망을 보던 병사가 그만 잘못 봐 “거란군이 쳐들어왔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현종은 놀라서 뛰쳐나가고 민심마저 흉흉해지는 소란이 발생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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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이었던 나주시에는 근대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왕건이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왕건의 뒤를 이어 제2대 혜종이 됨으로써 나주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1018년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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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현종보다 더 빠르게 이곳을 도착해서 찾은 것은 나주곰탕이었다. 봄의 분위기에 맞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야경을 보는 것도 역시 먹고 난 후가 적당할 듯했다. 나주에는 곰탕 맛집으로 알려진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여러 곳을 모두 다녀보았는데 조금씩 맛은 다르지만 개성이 있어서 번갈아가면서 먹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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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점은 특별히 김치가 맛이 좋았다. 전라남도식으로 담근 김치와 나주곰탕의 궁합이 기가 막혔다고 할까. 아쉽다고 생각할 정도로 시원하고 매콤함이 스며들어 있는 그런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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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려시대에는 나주곰탕은 없었을 듯하다. 일제강점기인 태평양전쟁 때는 하루 최대 400마리 이상의 소를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 공장에 동원돼 일하던 나주 사람들에게 봉급 대신 소의 주요 고기를 뺀 내장과 머리 등의 각종 부산물을 주었는데 그 부산물을 끓여 나주 장터에서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나주곰탕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소가 들어간 음식은 나주에서 해 먹긴 했지만 지금처럼 대중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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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 먹고 고려 현종이 머물렀을 공간으로 걸어가 본다.  나주에 가면 그 크기만으로 위풍당당한 금성관은 조선시대의 객사 건물로 금성관의 특징은 다른 지역의 객사들과는 달리 궁궐의 정전과 비슷하게 구성된 점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부터 1895년 나주 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주목이 유지된 곳이다. 왕이 옮겨가면 그곳이 임시지만 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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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 뒤에는 금성산성이 있는 금성산이 있으며, 앞에는 목포에서 나주로 들어오는 영산강이 흘러가고 있어서 한양과 비슷한 느낌과 문화적인 환경으로 자리를  하고 있다. 나주읍성은 조선시대에는 작은 서울이라는 뜻으로 소경으로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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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라는 도시는 고려왕실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고려를 건국하게 해 준 것도 고려를 지탱하게 해 준 의미를 가진 곳으로 이곳을 설계할 때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현종은 이곳까지 피난을 왔다 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불교기반으로 한 호불의 군주였지만 최치원을 비롯한 선유들의 배향의례를 제정하는 숭유 정책도 잊지 않고 고려의 정신적인 분야에 기반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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