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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의 역설

착한 것을 강요했던 한국의 전통은 바뀌어야 한다.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착한 것을 강요하는 나라가 있을까. 착하다는 것을 선이라고 보고 이해관계가 명확한 사람을 다소 각박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착하다는 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득을 좀 챙겨도 되지만 착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좀 손해를 보아도 된다는 식이다.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이른바 착한 남자에 대한 이미지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착한 남자란 자신을 희생을 해서라도 여자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면서도 자상한 스타일의 남자를 의미한다. 즉 여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남자가 해주어야 된다는 식이었다.


고전소설로 들어가 볼까. 지금까지 흥부전에서 선과 악으로 대립되는 대상으로 흥부와 놀부가 등장한다.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윤리소설이면서 권선징악이 거론이 된다. 정확하게 표현은 안되었지만 놀부는 적자, 흥부는 서자가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분위기는 장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제사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 보아도 불공평한 처사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부는 별다른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았다. 흥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어서 매를 맞아야 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매품팔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여기까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 판에 주야장천 아내와의 사이에서 관계를 하고 아이를 그렇게 낳았다. 흥부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그냥 착한 사람이었다. 이미 분리가 된 가구에서 놀부가 욕심이 많기는 했지만 흥부를 찾아가서 때리고 괴롭히고 돈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이 먹고 살 것을 달라고 찾아갔던 것은 바로 흥부였다. 그것도 자주 방문해서 매우 난감하게 만들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놀부의 인색함은 탓할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되는대로 살고 되는대로 아이를 낳은 흥부가 잘한 것도 없다.


결국 흥부는 하늘에 빌기로 했다. 스스로 운명을 개쳑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오직 착함으로 승부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제비가 집에 와서 살다가 새끼의 다리가 똑 부러진 것을 고쳐주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수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던 흥부의 재능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던가. 어쨌든 박을 여니 거기서 금은보화가 나와 큰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걸 보고 놀부는 제비 새끼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트려서 금은보화를 얻으려고 했지만 온갖 몹쓸 것이 나와 놀부의 집안이 망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착하고 성실한 것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신분제등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한국은 서민들에게 과도한 착함을 요구하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도 상당히 양분화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서민은 착하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 먹을 것을 쌓아야 당연하기에 노래를 부르면서 다니는 베짱이를 악으로 보고 있다. 요즘처럼 예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많이 버는 것에 대한 교훈인 것일까.


콩쥐와 팥쥐만 보아도 그렇다. 우리는 고생하려면 정말 제대로 고생하라고 강요를 하고 있다. 적당하게 고생하는 것은 인정하고 있지가 않다. 게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마치 미덕처럼 포장을 하고 있다. 분명히 언젠가는 그 착함이 보상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인해 인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욜로의 삶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균형감을 찾고 살아가면서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처럼 상대의 생각에 너무 치우치며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토끼와 거북이 동화 역시 기다림과 끈기 그리고 노력만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확실히 빠르지만 전력으로 집중해서 오랜 시간을 달릴 수가 없다. 반면 거북이는 그냥 오래도록 갈 수가 있다. 즉 단거리와 장거리에 적합한 캐릭터가 있는데 하나의 잣대로 평가를 해버리게 되면 토끼는 자신의 재능만을 믿은대 거북이에게 경기에서 져버린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람마다 경향도 다르고 가정환경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인 타인을 착하다고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하고 이득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부모와 자식은 전혀 다른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착하다는 말로 길들이려고 한다. 그리고 사춘기 등을 지나 변해버린 아이를 탓하기도 한다. 자식은 부모와 완전한 별개의 존재이며 그 재능의 일부는 부여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판박이의 인생을 살 수는 없다. 착함의 역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삶에서 행복의 길은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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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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