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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Sep 16. 2024

카이트 서프 호스텔, 담배, 피자나잇

여행 4주차

9.9(월)


브런치

일주일에 두 번씩은 브런치에 올리려고 했는데 지난주차 마무리가 쉽지 않다. 읽다가 다시 쓰고 지우고 멈추고를 반복 중이다. 관건은 마음에도 없는 말들 같다는 것. 핸드폰으로 적어서 그런가 도구 탓도 해보지만 계속 써야지 별 방도가 없다. 덕분에 이번 주차가 밀리고 있다. 누가 보면 대단한 거 쓰는 줄 알겠네.


카이트 서프 호스텔

발리나 시아르가오를 여행할 때와 다른 점은 시칠리아 호스텔은 여행자끼리 모이는데 소원하다는 점이다. 스몰토크도 많지 않고, 대체로 숙소마다 머무는 기간이 짧다 보니 몰려다니는 일이 드물고 친구를 만들 기회도 적다.


나는 대체로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지난 여행을 돌이켜보면 친구가 있었던 때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시칠리아 마지막 숙소인 ‘카이트 호스텔’은 시칠리아 다른 호스텔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숙소의 위치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다. 제주 종달리와 매우 비슷하다. 내가 살던 종달리는 성산과 세화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큰 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적다. 두 중심지가 위아래에서 경제적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종달리는 개발 속도가 느리고, 오랫동안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편이다.


카이트호스텔이 위치한 '모지아-비르지' 역시 트라파니와 마르살라라는 두 항구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두 항구는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배로 실어 나르고 있다. 두 항구 사이에 넓은 만이 펼쳐져 있다는 점도 종달리와 유사하다. 얕고 넓은 바다로 두 지역 모두 염전을 만들었고, 소금으로 돈을 벌었다. 종달리는 이제 소금밭이 모두 사라져 가게 이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소금이 생산되고 있으며 관광지로도 활용되고 있다.


더군다나 바람이 매우 거세다는 점도 두 지역의 공통점이다. 파도가 없는 수심 얕은 만과 서쪽에서 불어오는 지중해풍은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카이트서핑 명소로 만들었다. 이 호스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주일 정도 머물며 카이트서핑을 즐기러 온 유럽 휴양객이다. 종달리 역시 얕은 바다와 명성 높은 바람으로 유명한 카이트서핑샵이 위치한 동네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정원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여자의 이름은 로라, 스위스에서 왔다. 그녀는 체크인하고 숙소가 맘에 들어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모든 말에 깔깔대고 웃는 그녀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녀는 재밌는 사실을 알려줬다.


“우리는 모두 이름이 두 개가 있어. 진짜 이름과 호스텔 이름. 나는 로라인데 사람들이 나보고 마리아래. 이유는 없어. 마리아처럼 생겼다는 거야. 네가 이름을 물어봤을 때 뭘 알려줘야 하는지 고민했어”로라는 아주 깔깔대고 웃었다.


그때 키가 큰 유럽 청년 둘이 걸어왔다. 카이트서핑을 마치고 오는 길로 보였다.


“올라프랑 마리오야” 로라가 말했다.


나는 올라프와 마리오와 인사했다. 내 인사멘트는 입이 닳을 지경이다. 이름은 동주야, 동. 주. 그래 발음하기 힘들 거야. 봉쥬르 대신에 동 쥬르라고 해도 돼. 아니면 내 성을 불러. 배. 비-에이-이. 비포 애니원 엘스 할 때. 그래 그거야. 그러면 대충 도원쥬라고 발음 해보고 몇 분 뒤에 지들 마음대로 부른다.


”올라프가 내 이름은 아니지만.. “ 올라프가 말했다.

”내가 다 설명했어 “ 로라가 말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다. 호스텔 공용공간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건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큰 베란다를 따라 푹신한 소파와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다. 서퍼들은 멀리 파비냐냐섬을 바라보며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아있다.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바닷가에 강한 태양빛이 비춘다. 누군가 음식을 해오거나 커피를 마시면 약간씩 상기된 사람들이 서로 쉽게 말을 건넨다.


내가 아직 서먹할 때쯤 로라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저 앞에 와이너리로 일몰을 보러 갈 거야. 같이 갈래? 로라 옆엔 나타샤, 올라프, 리사, 마리오가 있다. 나는 은근히 먼저 말을 걸어줘야 친구가 되는 성격인 듯하다. 일몰에 맞춰 달리기 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금세 접고 흔쾌히 같이 가기로 했다. 대신 내일은 장거리를 뛰어야겠다.


“좋지. 저 섬까지는 어떻게 가?” 내가 물었다.

“글쎄? 보트를 빌려야겠지?”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트를 빌린다고?”

”아니. 와이너리는 바로 이 앞에 있는 거야. 일분거리에 “ 로라가 깔깔대고 웃었다.

”걸어가자 “ 올라프가 말했다.


로라 말대로 숙소 앞에는 와이너리가 펼쳐져있었다. 종달리로 치면 무나 당근에 해당하는 게 이곳의 포도인 듯했다. 얕고 넓게 펼쳐진 만에 소금밭이 형성되어 있고, 그를 마주 보는 들판에는 포도밭이 깔려있다. 포도밭 사이사이로는 몇 개의 와이너리가 일명 ‘노상’ 술집을 운영 중이다. 포도나무를 인테리어 삼아 근사한 벤치와 바닥에 앉는 자리들을 펼쳐두었는데, 좌식 배치가 꼭 한강고수분지 같기도 했다. 와이너리에 처음 간 리사와 나는 감탄사를 난발했다. 포도나무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석양에 물든 포도밭에서 사진을 찍어대느라 주문하기를 깜빡하고 있었다.


카이트 서프 호스텔


9.10(화)


LSD

눈을 뜨니 이미 9시다. 방이 껌껌해서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 잤다. 잘된 일이다. 와인을 마시고 떠들다가 1시에 잤으니 그리 오래 잔 것도 아니다. 애들한텐 6시에 일어나서 25km를 뛰겠다고 선언하고 잤는데, 애들은 9시에 요가를 하겠다고 했더랬다. 다들 일어났는진 모르겠다. 아무도 안 일어났다에 가지고 있는 동전을 다 걸지.


어제는 달리기를 생략했고 오늘은 장거리를 뛰려고 했다. 고민이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뛰었어야 하는데 지금 나가서 뛰어도 장거리를 할 수 있을까. 달리고 한 시간 되면 마른오징어가 되어 포기하고 돌아 올 확률이 높다. 게다가 땀을 많이 흘리면 이상하게 잠을 잘 못 잔다. 하지만 장거리 훈련을 하기에 숙소는 최적의 조건이다. 무려 정수기를 가 있다. 물을 살 필요가 없다는 건 아주 큰 혜택이다. 숙소 앞으론 와이너리와 소금밭을 가로지르는 자전거도로가 깔려있다. 여기서 4월엔 하프마라톤도 열렸단다.


나는 아침을 먹으며 한 시간 정도를 고민했다. 어제 사둔 요구르트에 그래놀라를 부어서 먹었다. 원래는 빵에 샐러드를 먹으려고 했는데 야채 씻기가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먹는 동안 리사가 묻는다. “오늘 뭐 할 거야? “ 나는 말한다. ”글쎄, 러닝? “ ”그래 너 25km 뛴다고 했지? “ 그래 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덥지 뭐. 어기적어기적 방에서 나온 올라프가 말한다. ”6시에 뛰러 간다더니 뛰고 왔어? “ 나는 말한다. ”이제 뛰러 가야겠군 “ 시간은 열 시였다.


막상 나가보니 밤새 세찬 바람에 무더위가 어느 정도 씻겨 나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태양을 듬성듬성 피운 구름이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날씨가 이대로만 계속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늘은 놀랄 만큼 선선했다. 카이트서핑이 유명한 동네답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속도를 올려서 뛰었다. 옷을 벗어 러닝벨트에 묶었다. 이따금씩 구름 사이로 해가 튀어나오면 속도를 늦추고 그늘을 찾아 요리조리 달렸다. 땀이 나는 속도와 마르는 속도가 비슷했다. 오늘은 장거리 하기에 너무 나쁜 날씨는 아니었다.


마르살라 항구 방향으로 달릴수록 소금밭이 많이 나타났다. 과거의 종달리도 이런 풍경이었을까? 하얀 소금 언덕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질서 있게 나눠진 네모난 규격 안에 같은 위치마다 소금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소금 언덕 사이를 지나다니는 포클레인이 언덕 뒤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거대한 언덕이 모두 다 소금이라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소금밭 사이로 오래된 풍차와 가공소가 보였는데, 입구에 매표소가 있는 걸로 보아 관광객을 받는 듯했다. 나는 다시 종달리를 생각했다. 그 많던 소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커다란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이따금씩 안심했다. 하지만 내가 달리는 방향 때문인지 구름이 실시간으로 모양을 바꾸기 때문인지 태양이 직접 내리쬐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방금 커다란 구름이 어디로 갔지, 이런 생각을 하며 달렸다. 나는 결국 그늘을 찾기를 포기하고 느려지는 내 몸에 몸을 맡겼다. 5킬로 지점에서 반환했고 한 시간이 지나 10킬로에 도달했을 때, 물을 마시기 위해 숙소로 들어갔다.

염전

숙소엔 열댓 명이 아침을 해 먹고 있었다. 카이트서핑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양새였다. 벌써 다 뛴 거야? 25킬로라고 했나? 몇 킬로 남았어?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정수기로 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뭐라고?라고 다시 묻자 로라가 묻는다


“몇 킬로 뛴 거야?”

“10킬로.”

“실망이야”페데리코가 말한다.

모두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다 뛴 줄 알았지”

“이제 한 시간 됐는 걸”


나는 얼른 물통을 챙겨서 다시 뛰러 나갔다. 이번엔 북쪽으로 뛰었다. 소금밭은 없어지고 카이트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시야를 채웠다. 비포장 도로가 잦아지고 외진 데로 접어드니 예상외로 몇 개의 캠프사이트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해먹에 널브러져 있었고 여러 장비가 오가는 걸로 보아 카이트서핑 스쿨인 듯했다. 캠프사이트를 지나쳐 땅끝에 다다르자 서핑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발판에 이르렀다. 커다란 카이트를 잡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다 수면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카이트를 가리키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5킬로마다 물을 뜨러 숙소에 들렀다. 숙소에 들를 때마다 밥을 먹던 애들이 몇 명씩 사라졌다. 이제 얼마 남았어? 10킬로. 이제 얼마 남았어? 5킬로. 물을 뜨러 가서 시계를 볼 때마다 30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다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서핑스쿨 방향으로 뛰고 있으면, 서핑을 하러 가던 애들이 나를 보고 자동차 경적을 울려댔다. 내가 마지막 반환을 마치고 25킬로를 채워 숙소로 돌아왔을 땐 모두 서핑샵에 가고 아무도 없었다. 오후 열두 시 사십 분이었다. 그늘을 찾아 누운 마야가 곁눈질로 나를 보고 꼬리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담배

와인을 마시다가 마리오에게 물었다. 너네는 왜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 거야? 마리오는 대답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어 너도 해볼래? 하더니 내 옆자리로와 자세를 고쳐 앉는다. 내가 궁금한 건 너희는 왜 죄다 담배를 돌돌 수제로 말아 피냐고.


듣자 하니 너무 비싸단다. 한국에선 얼마야? 글쎄 한 3유로? 세금은 절반정도. 너넨 얼만데? 네덜란드는 13유로. 20개 들었어. 세금은 90퍼센트 정도 될 거다. 이렇게 하면 얼만데? 아 그러니까 직접 말아피지. 뭐 이런 대화를 했다.


나는 살면서 담배를 딱 두 대 펴봤다. 오늘부로 세대가 됐다. 쨌든 2년에 한 대 정도 피고 있으니 흡연자라고 하든지. 처음엔 강릉에 놀러 갔다가 친구 거를 뺏어서 펴봤다. 안 피더라도 뭔지 알고 안 펴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담배를 처음핀 중학생처럼 콜록댄 기억이 난다. 다음날 아침까지 입에 역한 냄새가 남아있어서 평생 담배필 인 없겠군 알게 됐다. 두 번째는 발리에서 폈다. 담배를 돌려서 피길래 나한테 권할 때 와이낫, 이라는 심정으로 받아서 폈다. 영국인 녀석이 담배 공급에 아주 능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땐 술을 꽤 많이 먹었는데, 다음날 술냄새보다 담배냄새가 더 역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와이낫, 이라는 심정이다. 마리오와 올라프가 입술에 필터를 물고 정성스레 담뱃잎을 정돈하고 있는 모습을 꽤 이해하고 싶었다. 마리오는 차례차례 알려줬다. 담배마는 순서를 유튜브로 찍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왼손 검지로 종이를 잡고 오른손으론 필터를 올린다, 필터와 종이사이에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굳게 잠근다, 담뱃잎을 쏟고 골고루 펼치기 위해 종이를 앞뒤로 비벼댄다. 나는 종이를 앞뒤로 비비는 게 전혀 안 됐다.


“처음에 누구나 안 되지 “ 옆에 있던 페데리코가 말했다.

페데리코는 18살이다.

“처음엔 나도 이랬어” 마리오가 말했다.

“초밥을 생각해. 아주 살살 달래 가며 감싸주라고”

마리오가 말했다.

“그래 스시” 내가 말했다.


결국 마무리는 마리오가 해줬다. 아무튼 내가 95퍼센트 정도는 공이 있는 담배에 마리오는 불을 붙여줬다. 내가 종이를 입에 물고 볼을 홀쭉 빨아들이자 코끝으로 너머로 빨간 불빛이 선명해졌다.


온갖 애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들이마셔. 삼키진 말고. 뭐 이런 얘기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닌 공기가 입 밖으로 빠져나오면 애들은 그건 아니라고 탄식을 했다. 난 이 녀석들의 조언대로 숨을 들이마시는 동시에 입에 머금은 연기를 폐 속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얘기가 들렸다. 세 번째로 숨을 들이마셨을 때 비로소 자연스럽고 깊은 담배연기를 공기 중으로 뿜을 수 있었다.


“이제 알겠군” 내가 말했다.

“이건 담배냄새도 별로 안 나는데? “

“종이의 차이야” 열여덟 살 페데리코가 말했다.


마리오가 한대 더 주냐고 했을 때 나는 방금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역시 너는 퍼니스트 가이야, 마리오가 말했다.



9.11(수)


로포델로

바람이 없는 날엔 카이트 서퍼들이 모두 쉰다. 그 덕분에 어제는 다들 세네시까지 술을 먹어댔다. 오늘도 10시가 되니까 어슬렁 기어 나온다. 베란다 큰 테이블에 각자의 아침밥을 들고 모이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나 여러 명이 모임을 이루면 사람 사는 게 어디든 똑같구나 느끼게 된다. 의사결정 도구가 필요해지고, 각자의 캐릭터가 드러나게 된다. 비로소 마찰이 생긴다. 열댓 명이 넘어가면 소 그룹으로 쪼개진다. 누구는 리딩에 능하고 누구는 남의 결정을 따른다. 누구는 적응성이 강하지만 누구는 결함을 잘 찾아낸다. 자기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으로 불만을 쌓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결국 경우에 따라서 마찰이 드러나는데, 호스텔은 갈등 해결이 필요할 만큼 오랜 시간 붙어지내진 않으므로 아주 미묘하게 감지만 될 뿐이다.


나는 외국 호스텔에서 주로 만남이나 여행 계획을 주도하지 않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하는 편이다. 유럽-영어권 애들이 다수를 이루면 그 대화에 완전히 녹아들기 어렵다. 텍스트는 이해하지만 콘텍스트는 이해하지 못한다. 일대일로는 대화를 나누는데 두려움이 없지만 다중으로는 깊은 대화가 안 된다. 카이트 호스텔에 있던 애들은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영어권 애들과 있을 때에 비해선 편안히 대화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대화로 느껴진다. 독일 억양의 영어와 맥락을 이해해야 대화에 녹아들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나를 잘 듣고 차분하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여길 때가 많은데, 사실 나는 끼어들어 대화를 주도할 만큼 영어가 유창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무슨 말을 하면 웃긴 말로 들리나 보다. 마리오는 만난 지 하루 만에 너같이 재밌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봤다고 했다. 내가 독일에 얼마나 재밌는 사람이 없으면 그러냐고 했더니 다른 애들이 좋아한다. 내가 하도 모기를 잡고 스프레이를 뿌려대자 너는 모기를 무서워하는구나,라고 한다. 나는 유럽 모기가 아시안피를 빨아본 적이 없어서 더 맛있어하는 중이라고, 나도 가끔 유럽피가 빨고 싶다고 했더니 엄청 좋아한다. 로라는 그런 나를 보고 너는 너무 극적이야,라고 한다. 사실 그건 내가 극적이지 않은 일상적 영어표현에 너희들 보다 서투르기 때문이란다.


얘기가 딴 데로 샜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주 긴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으면 거기에 녹아들긴 어렵다, 이 얘길 하려고 했다. 어젯밤 파티에 다녀왔을 때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말을 잘하는 가여운 한국친구는 유럽친구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캐치하는데 느릴 수밖에 없다. 자전거를 타고 새벽에 바에서 돌아오는데 로라와 올라프가 독일 억양의 영어로 웅얼웅얼 떠들어댔다. 내용은 주로 우리와 같이 다니던 다른 독일 여자, 리사를 흉보고 있었다.


“리사는 나를 엄청 미워해”

“경쟁자로 생각하는가 보군”

“지금도 남자를 사냥중이야 “

”오늘 누구를 잡을까? “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끔 “뭐라고?”라고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파도소리에 다 묻혀버려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왼쪽 귀로 들리는 대화는 긴밀해져 갔다. 긴밀해질수록 그들은 내가 대화를 듣고 있어도 상관없고, 못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 장벽이 나쁘지 않았다. 계속 자전거를 밟을 뿐이었다.


아침이 되자 호스텔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로라와 리사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누가 누구 편인지 감지하는 레이더가 머리 위에 켜진 듯했다. 나는 물론 집단 우선의 사고를 가진 한국인의 갈등 과몰입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속됐던 모든 집단에서 겪어온 일이었다. 호스텔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차라리 갈등이 터지면 글로 쓰기 좋을 텐데 라는 생각도 했다.


오늘 아침의 안건은 카이트 서핑이 취소된 시간을 뭘로 대체하고 노느냐였다. 리사를 제외한 로라와 남자애들은 ‘로포텔로’라는 멋진 곳에 가서 수영을 하고 쉬고 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나는 구석에서 마야랑 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같이 길거야?라는 말에 그래! 하고 말았다. 하지만 리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리사는 검색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이대로 ‘로포텔로’에 가면 많은 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차장은 아주 멀리 있고 이마저도 터무니없는 요금을 내야 한다. 해변에 진입하려면 입장료를 또 지불해야 한다. 한 시간 넘게 걸려 거기까지 갈 가치가 없다. 근처에 좋은 해변이 많다. 리사는 거침없이 로라와 주도한 아이들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열명이 놀러 나가기 위해 필요한 건 꼼꼼한 검토가 아니라 무턱대고 움직이는 행동력이었다. 로라와 아이들은 리사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나 역시 어떻게 되겠지 하고 출발을 기다렸다.


우리는 테사와 페데리코의 차에 나눠 타기로 결정하고 로포텐로로 출발했다. 테사의 차에는 로라와 올라프와 마리오가 탔다. 페데리코의 차에는 나와 리사가 탔다. 작은 경차가 시칠리아의 무더운 올리브 벌판을 달렸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카포 델 토로’가 보이는 커다란 전망대에 이르게 됐다. 중세도시의 붉은 풍경이 굴곡진 해변과 함께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화장실을 들르기 위해 차를 세웠다.


“그들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리사가 나에게 말했다.

“지금 가봐야 주차장을 한참 찾아야 한다고. 해변에는 내려가지도 못해, 입장료는 인당 15유로 씩이야“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영어가 막히는지 말문이 막히는 건지 헷갈렸다.


“그들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내가 이렇게 보냈더니 그냥 가서 찾아보자고 답장하더군, 나를 완전히 짜증 내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어. 나는 지금 화가 나”


“화가 날만 하다” 내가 말했다.


그리곤 화장실에 가며,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려봤다. 문장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금 쓰면서 적어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들은 너를 무시하려고 하는 게 아닐 거야. 우리는 사람이 아주 많잖아. 완벽한 결정이 아니라 아무 결정이나 필요하지. 여행에 필요한 건 사실 생각이

아니라 생각 없음일지도 몰라. 나는 로라와 올라프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전략적으로, 모두의 여행을 위해 ‘생각하지 않기’를 활용하고 있음을 느껴. 주차장은 가서 찾아보자는 대답은 그런 의미일 거야. 리사. 네가 화가 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겨버리는 일이야. 너랑 페데리코와 이 전망대까지 온 것도 신나는 여행이었다고 ‘


화장실에서 돌아온 우리는 전망대에 나란히 앉았다.

“페데리코. 너는 매일 보는 풍경이겠네?”리사가 물었다.

“전혀. 전혀 아니라고” 페데리코가 말했다.

“일 년에 한 번은 보겠지” 내가 말했다.

“일 년에 한 번” 페데리코가 말했다.


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리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 아주 많다. 나는 너의 화를 이해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엉뚱한 조합으로 흘러나왔다.


리사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래서 그냥 전망대 풍경을 바라봤다.

로포델로

페데리코

이름 페데리코, 나이 18살, 라 사피엔자 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입학을 앞두고 아빠 돈으로 여행 중. 그는 우리 일행 중 유일한 이탈리아인으로 자기보다 열 살이 많은 형누나들에게 엄청나게 잔소리를 하는 중이다. 파스타의 변칙을 용납하지 않는 그에게 나는 네가 한국에 오면 우유를 부어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온갖 손동작을 섞어서 까르보나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네가 정말 오리지널을 원한다면 말이지? 돼지의

볼살을 사야 해. 꼭 그 기름으로 요리를 해야 하고.. “ 그가 말한다.


무엇보다 내가 놀라운 점은 그의 나이가 18살 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애가 어떻게 한국택시기사처럼 운전을 하는지, 어떻게 수영을 저렇게 잘하는지, 어떻게 담배와 영어에 저렇게 능통한지, 어떻게 그토록 까다로운 파스타 입맛을 가졌는지, 어떻게 경차에 윙 서핑 장비를 싣고 바람을 타러 다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있잖아, 나는 네가 어떻게 이런 취미를 하는지 놀랍군”

“무슨 말이야?” 페데리코가 말했다.

“네가 한국의 18살이었으면, 이 모든 걸 할 줄 안다는 게 말이 안 돼” 내가 말했다.

“왜?”

“엄청나게 공부만 해야 하거든”

“우리도 엄청나게 공부만 해야 해! “


나는 우리가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너희랑 다르게 우리는 공부를 한다는 말처럼 들린 듯하다. 나는 따로 수정하지 않았다.



9.12(목)


조깅

7시 정도면 창 밖이 밝아지고 잠을 뒤척거리기 시작한다. 다른 게스트가 문을 드나드는 소리가 들리고 남의 침대 너머 인기척이 들려온다. 이때 눈을 뜨면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그냥 지금 나가서 뛸까? 잠을 더 자고 싶지만 어차피 소음에 뒤척거릴 테고 더워지기 전에 뛰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뒤척거리다 결국 에이 나가자, 하고 신발을 신으면 9시가 된다.


어제 해변에서 수영할 때 입은 반바지를 그대로 입었다. 꿉꿉한 갯네가 잠을 깨운다. 여행 중 달리기를 반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은 빨래를 줄이는 것이다. 상의도 웬만해선 입지 않아야 한다. 땀에 젖은 빨랫거리가 하나 줄어든 다는 게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냥 팬티도 입지 않고 있다. 러닝하고 쇼츠와 양말만 쓱쓱 빨면 오후에 마를 정도의 빨랫감이 딱 좋다.


어제는 애들이랑 놀러 다니다가 결국 못 뛰었다. 나는 애들이 스프릿츠를 마실 때 콜라를 마시는 둥 밤중엔 러닝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숙소에 돌아오니 이미 열한 시 반이었다. 그렇게 하루 훈련을 빼먹었기 때문에 15km는 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베란다엔 리사와 테사가 일찍부터 앉아있다. 페데리코는 아직도 등을 켜놓고 자는 중이다. 열여덟 살 답다.


“오늘은 삼십 분만 뛸 거야?” 리사가 묻는다

“90분, 어제 못 뛰었기 때문” 내가 말했다.


이제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어온다. 카이트 서퍼들은 파도 서퍼들과 다르게 파도 얘기가 아니라 바람얘기를 한다. 어제는 바람이 없어서 못 탔고, 오늘은 바람이 ‘이상하다 ‘고 한다. 세차게 불기만 하는구만 이상하다는 건 뭘까. 경력자는 지중해풍이 어떻고 시로코바람이 어떻다고 한참을 떠든다. 마리오는 일찍 나간 카이터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세세한 일기예보를 보며 오늘의 서핑 계획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중이다.


나는 이상하건 말건 바람이 세차게 불기를 기대하며 뛰었다. 오래간만에 이른 아침에 뛰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뛸 기대가 생긴다. 공기가 선선하다. 구름 끝에 걸려있는 태양이 고개를 내밀까 아슬아슬하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속도를 올렸다.


늘 그렇듯 더 편하고 더 선선해지길 바라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태양이 구름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레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세차지만 ‘이상하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하좌우에서 불어온다. 아마 이 근방 어딘가에서 커다란 바람이 맞부딪히고 있는가 보다. 아니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똥이 마렵다는 사실이었다.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이미 4킬로 정도를 뛰었기 때문에 근방에 화장실은 없었고 결국 5킬로에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 1킬로를 조금 빠른 속도로 뛰었다. 예상보다 적게 뛰었으니 빨리라도 뛰면 좋겠지. 들어가면 화장실부터 갈 생각이다. 멀리서 뛰어오는 나를 본 마야가 꼬리를 흔들며 숙소 현관으로 또 달려온다. 입에 공을 물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잔다.


“달리기 잘했어?”리사가 묻는다

”나는 뛰면서 똥을 싸고 있었다. 응급상황“ 내가 말했다.

“좋은 정보 고마워” 리사가 말했다.


피자 나잇

피자 나잇은 인당 20유로, 끝도 없이 피자를 먹는 파티다. 우리로 치면 한 구석에서 무한정으로 전을 부치는 명절 풍경과 같다. 호스트 마테오는 우리가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하다. 그는 베란다에 커다란 휴대용 화덕을 가져다 놨다. 서울에선 맘먹고 먹으러 가야 했던 이탈리아식 피자들이 마테오의 손을 거치고 화덕을 지나서 우리 앞으로 쏟아진다. 이번엔 무슨 마리게리따고 저번엔 무슨 마리게리따 라는데, 나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지만 맛있는 건 확실하다. 내가 먹어본 중 최고예요, 리사가 말한다. 나는 여러 피자 중 앤초비, 멸치 어쩌고 한 녀석이 제일 맛있었다. 마지막으론 누텔라에 바나나를 잔뜩 바른 피자가 던져졌다. 나는 배불러서 손사래를 쳤지만, 카롤리나는 이거 가지고 배가 부르냐고 정신이 나갔냐는 표정이다. 입에 욱여넣고 맥주가 모자라나 고민하고 있을 때 누가 맥주 세병을 가져다줬다. 커피마실 사람? 유럽애들 전부가 손을 든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못 자요, 카롤리나가 또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네덜란드 여자애 테사는 라이터로 맥주 뚜껑을 딴다. 그녀는 키가 190도 넘을 것이다. 높이 치켜든 그녀 손이 꼭 천장에 닿을 듯하다.


피자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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