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5주차 2
9.18(수)
빈둥빈둥
숙소를 1박 연장했다. 카시스는 꽤 맘에 드는 동네다. 수영과 하이킹, 조용한 분위기와 깔끔한 경관을 다 갖췄다. 오늘은 지난 며칠 밀린 글과 향후 일정을 정리 할 생각이다. 바게뜨와 라면을 먹고 나와서 커피를 마신 뒤 해변에 앉아있다. 아주 멀리 플린이 보인다. 인사하지는 않을 생각.
글에 대해
처음엔 기록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읽을 거리’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러닝 얘기를 적고 싶었지만 사람 얘기를 더 많이 적고 있다. 이 글을 꾸준히 읽는 사람은 여서일곱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들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같다. 이슬아는 자기 수필의 상당 부분이 픽션이라고 했다. 나도 이 이야기가 대부분 픽션이라고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사실 일정 부분 그렇기도 하다. 하루를 축약하고 사건이 글자가 되면서, 대화는 따옴표에 갇히고 기억은 문장만큼만 기억된다. 따라서 ‘내 이야기가 사실은 픽션’이라는 고백에는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픽션’이라는 부연이 뒷따라야 한다. 시선없이 경험은 기록될 수 없다. 같은 논리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겪는 모든 일은 미완성된 픽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게 지금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겪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다.
그러니 나에게 수기를 적는 일의 의미는 경험의 사실관계가 뒤바뀔지언정 틀림없이 경험을 완성하는 데에 있다.
9.19(목)
또 해변에 누워서
카시스에서 4박을 했으니 이제 또 옮겨야 겠다. 일정을 스스로 압박하지 않으면 하염없이 눌러 앉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맘에 든 여행지에선 보통 4박을 했다. 시라쿠사, 리파리, 트라파니 그리고 여기. 며칠 있으면서도 보통 어디 안다니는 게 내 패턴이었다. 어쩌면 나는 별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엔 8시에 일어났다. 자꾸 잘때마다 엉덩이를 뭐가 문다. 모기는 아닌 것 같고 개미나 진드기인데 어제 두방 오늘 한방 물렸다. 가려움에 새벽에 깨서 한참을 뒤척거리다, 8시에 그냥 침대에서 나왔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핸드폰과 시작하고 싶지않아서 10시까지 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 주방으로 가서 녹찻잎을 우렸다. 이쪽 의자가서 앉아있다가 저쪽 의자가서 앉아있다가 길고양이 마냥 자리를 옮겨댔다. 정말이지 할게 없는 무료한 시간,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앤드류
앞방에 사는 앤드류는 스위스에서 온 트레일러닝 코치다. 그의 집은 로잔으로 플린과 같다. 영어가 안되는 턱에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러닝복장, 그것도 누가봐도 산에 뛰러가는 애 차림으로 서로를 마주치면 짧게나마 아는 체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 아침 내가 빈둥대고 있을 때 그가 서둘러 준비하고 있는게 보였다. 이리저리 벨트를 찾으러 움직이더니 양말을 신고있다.
“오늘 뛰어요?” 내가 물었다.
“지금 뜁니다. 당신도요?” 앤드류가 말했다
”뛰어야 해요. 어제 쉬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앤드류가 그말에 크게 웃었다.
앤드류는 가슴에 커다란 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유티엠비 몽블랑에 꼭 가고싶어요. 당신 티셔츠 처럼“ 내가 말했다.
앤드류는 흥미를 보이더니 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 첩을 뒤졌다.
”여기가 몽블랑이죠. 내 집에서 보여요“ 그가 말했다.
“당신은 큰 행운이군요” 내가 말했다.
“당신 마라톤 기록은요?“ 앤드류가 물었다.
”3, 2, 1 입니다. 당신은요?“
”잘하네요. 나는 뛴적이 없어요. 트레일만 뜁니다. 언젠가 뛴다면 키로미터 당 4분 15초로 뛰겠어요“
“서브 3”
“네, 서브 3”
”당신은 무릎이 안아픕니까?“ 내가 물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일주일에 한번. 웨이트트레이닝. 반드시. 데드리프트, 스쿼트, 복근“
마지막 수영
오늘은 수영을 안해야지 했는데 결국 했다.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불현듯 해가 쨍쨍해지길래 그 길로 해변으로 방향을 바꿨다. 마지막 수영일 것이다. 순례길을 출발하면 수영 할 곳도 없고 계절도 바뀐다. 겨우 세탁한 바지를 적시고 싶진 않았지만 한번 더 빨지 뭐. 이제 막 뽀송해진 바지를 다시 입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물이 엄청 차다.
이제 자유형법으로 50미터는 갈 수 있다. 이후 부터 급격하게 숨이 가쁘지만 한달전을 생각히면 엄청난 발전이다. 물이 차갑지 않았으면 더 갈수도 있었을까? 마리오와 내년에는 함부르크 트라이애슬론에 나가자고 장난삼아 얘기 했었다. 이 속도면 내년 가을엔 1킬로 쯤이야 헤엄칠 수 있겠지.
돌밭에 바지를 벗어 널어놓고 팬티바람으로 앉아서 이걸 쓰고 있다. 아무도 누가 무슨 차림이든 신경쓰지 않는다.
해변 끝에 앉아있던 플린과 작별인사 하고 나왔다. 그녀는 핸드폰을 전혀 보지않는다. 사진도 찍지 않는다. 그녀는 온 신경을 자신의 육신에 집중하고 있다. 반나체로 하루종일 해변에 누워있다가 앉아있다가 잠들었다가 수영을 조금 하다가를 반복한다. 계속 파도소리를 들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밤 그녀가 자신은 운이 좋아 재활 끝에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힘으로 그 행운을 만들어 냈는 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플린과 연락처를 교환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메일만 받았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문자와 전화만 쓴다. 인스타그램이야 당연히 없고 전세계 공통 메신저 왓츠앱도 안쓴단다. 핸드폰의 노예가 되고 싶진 않았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카톡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긴 한다.
“너가 사는 섬으로 돌아 가면 사진을 보내줘. 바람이 많이 분다고 했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처럼 바닷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순례길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별달리 준비한 게 없다. 삼사일 뒤면 출발이다. 어느 코스를 걸을 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왜 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값싼 여행 코스라서? 너무 저질인 듯하다. 도전을 하고 싶어서? 솔직히 그런 건 없다. 아무렴 어떻겠냐는 생각이다. 지금 필요한 건 데카트론에 가서 긴 바지를 사는 일.
페탕크
헥토는 카시스 호스텔을 엄마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자 직원이다. 나는 그의 친절함에 꽤 놀랐다. 투박한 프랑스식 영어발음에 몇번이고 그의 안내를 다시 물어봐야 했지만 헥토는 늘 웃으며 다시 설명해주었다. 내가 그에게 마르세유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물어봤을 때 그는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당신도 마르세유에 가요?“ 내가 물었다.
“거기가 집이니까요!” 헥토가 말했다.
마르세유에 사는 헥토는 30분거리 호스텔로 매일 같이 출퇴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경차 뒷자리에 내 가방을 싣고 마르세유를 향해 달렸다. 버스와 기차에서는 볼 수 없던 프랑스 남부 국립공원의 풍경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나의 신상과 여행에 대한 아주 뻔한 대화를 나눴다. 헥토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 같기도 했고 작은 차안의 침묵을 깨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또래로 추정했는데 덕분에 금세 긴장을 풀었다.
“내가 불어를 못해서 프랑스 사람들이 불친절 할거라 생각했어“ 내가 말했다.
”어디나 불친절하지. 관광객이 너무 많으면 말이야“ 헥토가 말했다.
”그런데 무척이나 친절한 걸“ 내가 말했다.
헥토는 흥미로워 했다.
”한 친구는 마르세유는 밤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어” 내가 말했다.
“프랑스 사람이야?”
“프랑스 사람. 파리에 산대”
“역시. 파리지앵 같으니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마르세유 출신의 프랑스 랩퍼 ‘줄’의 노래를 틀었다. 아주 유명해, 마르세유 출신이라 은근 자부심을 느끼지, 헥토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유명한 한국 노래가 없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도저히 내가 아는 노래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내게 핸드폰을 건넸을 때 나는 한국 카테고리 제일 위에 있던 BTS의 Dynamite를 틀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차창밖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둘다 지루해했다. 나는 터져나오는 하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따가 ‘페탕크’를 할꺼야. 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서 할텐데 같이 할래?” 헥토가 물었다.
“페탕크가 뭐야?” 내가 물었다.
“공원에 쇠구슬 가지고 노는 사람들
못봤어?” 헥토가 말했다.
니스랑 카시스에서 봤다. 공원마다 아저씨들이 여러명 모여 오렌지만한 구슬을 던지고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구슬을 맞춰야 하는 듯 했다. 나는 카시스 에서 제일큰 레스토랑 앞에 있는 공원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고 헥토에게 말했다.
”바로 그거야. 프랑스 남부에서 많이 들 해. 시간을 보내기도 좋고. 같이 술을 마시기도 좋지“
”우리도 그런게 있어“ 나는 비석치기를 떠올렸다.
“구슬을 던져?” 헥토가 물었다.
“아니 나무를 던져” 내가 말했다.
“나무?”
“나무”
”공원에가면 사람들이 그걸 많이 해?“
”아니 아무도 안해”
“너는 해?”
“초등학교 다닐 때만. 전통놀이지만 어른이 하진
않아“
”우리도 이게 전통이야. 시간을 보내고 같이 술을
먹기 딱 좋지. 여섯시 반쯤 할텐데. 시간이
되면 와. 주소를 알려줄게” 헥토가 말했다.
그는 숙소로 찾아가기 좋은 대로변에 나를 내려줬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교환했다. 이따 메세지 할게, 하고 헥토가 윙크했다. 얘네는 정말 윙크를 잘한다.
나는 구슬치기를 같이하기로 했지만 막상 오늘 달리기 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제 쉬었기 때문에 적어도 한시간은 뛰어야 했다. 저녁에 헥토를 만나면 맥주를 마시게 될테고 달리기가 어려워진다. 숙소에 짐을 푼 나는 러닝용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러닝을 우선으로 하고 헥토 약속은 조율 할 생각으로 헥토에게 메세지를 보내려고 했다. 그때 헥토가 먼저 메세지를 보내왔다.
“여섯시 반까지 루 뜨 시몬가 5번으로 갈거야. 온다면 환영할게“ 그가 말했다
나는 답장했다.
“땡큐 헥토. 고맙지만 나는 오늘 꼭 달리기를 해야해서 말이지. 너네가 페탕크를 하고 있으면 그쪽으로 뛰어 가서 인사나 할게“ 나는 이렇게 메세지를 보냈다. 가볍게 ‘인사나 할게’의 어감을 영어로 어떻게 전달 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랐다.
시간이 지나도 헥토의 답장이 없어서 나는 뛰러 나갔다.
이제는 도시 경관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질녘 유럽 풍경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러닝을 계획할 때 언제부턴가 관광보다 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명소를 들를까 고민하지 않는다. 몇분을 뛸지만 생각하고 있다. 고풍스런 건물과 햇빝을 전부 반사하는 노랗거나 하얀 타일들. 똥과 오줌의 잔해와 가끔 풍기는 대마 냄새. 이유 모를 괴성을 지르는 사람과 기타나 멜로디언을 켜는 사람. 유럽의
도시 풍경은 다 거기서 거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마르세유 항구로 뛰어 나갔다.
항구를 크게 한바퀴 돌고 시내로 들어갈 때 쯤 헥토가 메세지를 보냈다. 유럽애들이 늘 그러듯 목소리를 녹음해 보내왔다. 나는 잠깐 달리기를 멈추고 메시지를 재생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여러번 돌려 들어야 했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냥 추정했다.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여기서 울랄라는 이해 못한 말들이다.
“울랄라 우리는 여기에 도착했어 울랄라 너가 우리랑 같이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우리는 술을 마실거야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만약 온다면 망설임 없이 환영 할게 울랄라 재밌게 뛰어“
나는 그자리에 서서 메세지를 보냈다.
”오케이, 그러니까 게임을 마치고 한 잔 한다는 거지? 너네만 괜찮다면 나도 같이 마실게. 내 러닝은 30분 뒤에 끝나. 만약 내가 오해했다면 알려줘. 영어 메세지를 목소리로 주고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지“
나는 다시 시내로 뛰어들어갔다. 이상할 정도로 심박수가 높게 찍혔다. 오르막이어서 그럴까. 달리기를 하다보면 기대보다 내가 잘뛰어서 기분이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생각보다 숨이 차서 찝찝할 때가 있다. 마르세유는 숨이 너무 찼다. 나는 숨이 찰수록 에라이 모르겠다 더 빨리 뛰어댔다. 오랜만에 헐떡거리는 달리기였다. 시내의 뒷골목은 똥과 쓰레기가 뒹굴었고 건물사이로 멀리 보이는 바닷물에 노란 노을빛이 반사돼서 눈이 부셨다. 나는 아주 높은 언덕으로 큰 신음소리를 내며 뛰었다.
두번의 대결을 했다. 한번은 큰 계단을 뛰어올라갈 때 앞에 뛰던 남자였다. 나는 그를 제치고 싶었지만 그 생각을 할 무렵 그는 이미 쏜살 같이 계단을 뛰어올라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다른 한번은 해안을 따라 키로미터당 4분 30초 페이스로 뛰는 남자였다. 다부진 몸에 형광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누가봐도 밥먹듯이 뛰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오분정도 따라가다가 멀리 놓아주었다.
헥토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니 우리는 게임 안해. 공원이 문을 닫아서. 우리는 바에 있고 친구네로 자리를 옮길거야“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랬다. 러닝을 마치고 호스텔에 들어왔을 땐 벌써 한시간이 지나있었다. 4인실엔 나밖에 없었다. 손님이 없는 듯 했다. 혼자 잘 수 있을까 기대했다. 나는 헥토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케이”
편지
안녕하세요. 웨그너와 로즈마리씨
저는 동주입니다.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어요. 저희는 볼리비아에서 2017년 초에 만났었죠. 포토시 광산 투어에서 처음 뵙고,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뒤에, 두 분께서 캠핑카로 초대해 주셨던 그 때 말이에요. 벌써 7년이 흘렀네요. 두분은 잘 지내시고 계신지요. 안부를 묻기위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유럽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마친
뒤 3년간의 군 복무를 끝내고 여행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어요. 다음주 부터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아참, 포토시에서 같이 만났던 여자아이와는 몇년전에 헤어졌어요. 잘 살겠죠.
며칠전 우연히 스위스 로잔에서 온 멋진 친구를 한명 만났어요. 우리는 이틀동안 많은 얘길 나눴어요. 특히 저는 볼리비아에서 두분과 만났던 경험이 저에게 스위스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형성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토마토파스타를 할때마다 로즈마리께서 그날 해주신 파스타를 떠올려요. 그때 저는 모든 걸 새롭게 받아들일 만큼 어린나이였습니다. 당신께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요. 로잔에 사는 플린은 이 이야기를 정말 즐거워 했어요. 그녀는 두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저의 말에 이메일을 써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다 그 생각이 나서 이렇게 쓰는거에요.
두분은 무탈히 잘 지내시는지요? 여행은 잘 마치셨는지, 이제는 어디에 계신지도 궁금하네요. 홈페이지를 보니 10년간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가셨다고요. 피디버스라는 이름을 기억해서 이렇게 메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빨간 피디버스도 잘 있는지요.
한국은 큰 명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에요. 웨그너와 로즈마리씨가 건강히 지내시길 빕니다.
포토시 광산에서 만났던
동주 드림
추신, 저는 한국에서 ‘제주도’라는 멋진 섬에 살고있습니다. 두분께서 한국에 온다면 어디든 나가서 반길준비가 되어있어요. 그 날을 기다립니다.
9.20(금)
까르푸
기차역 앞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다가 그냥 까르푸에 들어갔다. 정말 잘한 일이었다. 매장안에 샐러드바가 있어서 그릇을 가져다가 파스타나 고깃덩이들을 포장해 계산할 수 있었다. 나는 신난 나머지 그릇하나를 파스타와 닭가슴살과 올리브와 치즈로 꽉 채웠고 12유로가 나왔다. 레스토랑에 갈 걸 그랬나.
이동 이동 이동
이제 장박은 없다. 마르세유, 뚤루즈, 바욘네에서 1박씩만 해가며 프랑스의 서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삼 일뒤면 순례길을 출발한다. 그때 까진 많은 시간을 기차안에서 보낸다. 각 도시 탐방은 러닝으로 족할 예정이다.
뚤루즈에 도착하는대로 데카트론에 다시 들려야겠다. 날씨가 쌀쌀해졌다. 반바지 세벌을 가져온 게 전부라 슬슬 한기를 느낀다. 긴바지를 살 생각이다.
뚤루즈가 집인 에바에게 시간있냐고 메세지를 보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을 시작한 시라쿠사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다. 뚤루즈에 놀러오면 투어해주겠다고 헤어졌는데 정말 뚤루즈에 가게됐다.
그녀는 프랑스의 웬만한 도시들을 별로 안좋아했는데, 뚤루즈만큼은 애정했다. 검색을 좀 해보니 뚤루즈에 간 한국인들이 굉장히 만족해한다. 그얘기는 아마 깨끗하고 편리하고 친절하다는 뜻일 것이다. “뚤루즈는 얼어붙고 있어” 에바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정말 그만큼 추울까 의심은 든다. 아침에 긴장해서 긴팔을 입고 나왔는데 지금 기차안은 덥다. 반팔을 입을 걸 그랬다.
그녀는 다섯시까지 프랑스어 수업을 하고, 일곱시 부터는 댄스 수업을 해야한다고 한다. 둘다 그녀가 선생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 그녀 집에 있는 정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에바
시덥잖은 얘기를 한줄만 메모해두자. 나는 그녀와 대화하는 동안 그녀의 발크기와 어깨 넓이, 목소리가 그녀 본래의 것인지 한참이나 궁금해했다. 정말이지 쓸모 없는 얘기다.
나는 에바가 알려준 주소까지 뛰어갔다. 만나는데 싱글렛 차림에 땀냄새를 풍기는 게 우려되긴 했지만 결국 개의치 않았다. 삼사키로 거리는 아무래도 뛰는게 제일 편하다. 주소에 도착해 햄스트링을 스트레칭 하고 있을 때 에바가 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했다. 삼주만에 보는 그녀였다.
그녀가 알려준 정원은 알고보니 그녀 집이었다. 밖에선 상상할수 없던 정원이 건물 안으로 펼쳐졌다. 우리는 이십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차나 군것질 거리 없이 정원 나무의자에 앉았다. 큰 나무 하나가 옆집 담을 넘어왔고 바구니며 전정가위 같은 정원 도구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눈동자가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푸른 고양이가 나를 보고 방안으로 숨어들어갔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야, 시력이 없어, 브라질에서 데려왔지. 에바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뚤루즈가 얼마나 깨끗한지, 시칠리아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끝없이 모기를 쫓아댔다. 이십분이 지나 그녀가 수업을 갈 시간이 됐을 때 우리는 포옹하고 헤어졌다. 뚤루즈에 하루 더 있어, 동네를 구경시켜줄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녀 말에 하루 더 뚤루즈에 묵었고 막상 그녀를 만나진 않았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친구와 깊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건 늘 멋진 일이다.
그녀의 집부터 호스텔까지 뛰어오는 길은 지도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가론 강을 따라 뛰었다. 헷갈릴 때마다 강 줄기 옆을 흐르는 도로를 찾아들어갔다. 어느 도시든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 뛰는 사람과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사실이 이제는 익숙해진다. 나는 장난기가 들어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봉쥬르 라고 인사를 했는데, 내 발음이 맞는지 에바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데카트론
살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결국 다 샀다. 긴바지와 파카. 워낙 추워지기도 했고 나중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상상하니 끔찍했다. 괜시리 돈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에바는 내가 툴루즈에서 한 일이 데카트론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놀려댔지만 나로서는 큰 일을 치룬거나 다름 없다. 프로틴바와 에너지젤도 또 샀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는데 생각 보다 돈이 없다는 것이다. 아 그건 새로운 문제가 아니구나.
모비딕
모비딕을 지워버려야겠다. 약 한달전에 시작해 삼분의 이정도 읽었는데 아직도 오백페이지 정도가 남았다. 미련이 남아서 붙들고 있는데 다른 책을 못읽고있다. 지운다.
(2주뒤 메모, 결국 모비딕을 지우고 아무것도 읽지 않고 있다)
9.22(일)
마고
이틀 내내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여행 초반엔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서 조금씩 끄적이던걸 모으면 읽을 만큼의 양은 됐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갈수록 동행이 생기는 일에 익숙해지고 종일 그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특히 영어 회화수준이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면 시간을 오래 보내게 된다. 툴루즈에서는 시라쿠사에서 만났던 에바를 다시 만났고, 같은 방 마고, 벤잠, 알베와 지냈다. 달리기는 총 세번 했고, 22킬로 정도를 뛰었다. 술은 총 맥주 두잔을 마셨고 하루에 한잔 씩 이었으니 꽤 마신 편이다. 잠은 거의 못잤다. 밤새 기침을 놀라울 정도로 하던 아줌마 한명이 모두를 못자게 했다. 아줌마가 겨우 잠들면 비로소 벤잠이 잠들었고, 벤잠이 코를 골아 다시 아줌마를 깨웠다. 잠에서 깬 아줌마가 기침을 하면 벤잠이 깼다. 밤새 그랬다.
나는 현재 기차를 타고 생장피에드포트로 가고있다. 내일 부터는 순례길을 걷는다. 며칠전 부턴 비가 멈출 줄을 모른다. 에바는 이 날씨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가겠다던데, 내 생각엔 이 날씨도 썩 나쁘지 않다. 차창밖으로 비에 젖은 초원이 보인다. 불어난 강물이 허무하게 지나간다. 정신을 좀 차리고 이어폰을 꼈다. Mat Kearney 의 <Drowning in Nostalgia>를 틀었다. 누군지는 전혀 모른다. 어제 마고가 공원에 나랑 같이 있다가 회사에 전화면접을 한다고 멀리 떨어졌을 때, 혼자 놀이터를 쳐다보며 듣던 노래다. 플랫화이트와 크루아상을 한번씩 입에 물고 아무도 없는 놀이기구를 한참이고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카시스에서 플린에 대해 적은 이후로 나에게 무언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녀의 말들을 따옴표로 옮길 때마다 안에서 끌어오르는 울컥거림을 마주해야했다. 그건 마법과도 같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는 발견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글자 위에서 춤을 추는 듯 했다. 그녀의 구석을 몰래 들여다 보다가 문득 나의 세상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나는 사람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제는 어쩔수 없이 타인을 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꼈고, 그 사실이 내가 느끼는 모든 답답함에 꽤 유용한 해방책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 쓰는 일에 계속 몰두 할 수도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마고는 1층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러닝을 마치고 방문을 열었을 때 네 다섯명의 사람들이 이제 막 통성명 중이었다. 나는 내 침대에 러닝벨트를 풀어 놓고 마고와 인사했다. 그녀는 키가 아주 작고 피부가 온통 하얬는데 보통의 프랑스애들이 그러듯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나는 그녀 볼을 보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나 짐작했다.
“영어로는 말콧. 마지막은 묵음이에요. 마고“
그녀는 파리 근처에서 미용을 공부하고, 1년을 더 공부하기 위해 툴루즈로 왔다고 했다. 그녀가 다니는 툴루즈에 있는 전문대학교에서는 직업훈련의 일환으로 취업을 지원하고 격주로 수업을 병행 한다고 한다. 피부미용, 왁싱도 배웠고 네일도 배워. 마사지도 배웠지, 헤어는 질색이야, 걔네는 조금 달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마고는 공부하는 동안 지낼 아파트를 구하기 전에 잠깐 호스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짐작대로 이제 막 스물두살이 된 아이였다. 하지만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면은 없었다. 나에게 유럽 애들은 결정에 능하다는 편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고는 나와 만난지 한시간도 안돼서 자기가 무얼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본인의 고민을 배려에 숨겨 미움을 피하고자 애썼다.
“너는 밤에 나갈거야? 너가 혹시 나갈거면 내가
따라나가줄 수 있어“ 마고가 말한다.
나는 마고와 뚤루즈 밤거리를 걸었다. 밤바람은 가을의 중턱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찬기운이 느껴졌다. 가게의 천막이 큰 소리를 내며 펄럭거렸다. 멀리서 날아온 쓰레기가 더 멀리 날아갔다. 혼자 다니는 건 무서워서 말이지, 마고가 말했다. 막상 여기 처음 나와봐. 내가 여행 일정을 설명하는 동안 마고는 말했다. 정말 혼자하는거야? 안무서워? 나라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거야. 정말 무섭지 않은거야?
“근데 어디로 갈꺼야? 어디로 가고싶어?“
”계속 질문해서 미안해“ 마고가 말한다.
나는 그녀에게 그만 미안하라는 말을 몇번 하다가 그만두었다. 우리는 퐁네프의 다리를 향해 걸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온 다리다. 다리와 광장이 나타나자 몇개의 술집과 큰 음악, 계단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앞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강가에서 마시다가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하이네캔 큰 병을, 마고는 단맛이 나고 알록달록한 작은 맥주를 골랐다. 마고는 당연히 자기가 계산을 하겠다며 카드를 들이 밀었고, 나는 한국인의 본능으로 카드를 가로막고 내 카드를 사장에게 건넸다. 사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카드를 받았고, 마고는 다음에 꼭 자기가 사겠다는 말을 끊임 없이 되풀이 했다.
우리는 강가에 앉아 대마냄새를 맡으며 맥주를 마셨다. 암만 생각해도 마고는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듯 했다. 그녀가 캐나다에 1년 살다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고는 끊임없이 자기의 부족한 영어를 미안해하면서 나에게 좋은 영어 선생이라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내가 춥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답했다. 우리는 더 추워질때 까지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다.
“캐나다에서 우리는 완전히 취했어. 내가 취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걔도 분명히 취해서 그런거같아. 나는 영혼이 빠져나가 내 몸을 쳐다보는 듯 했어. 걔는 끊임 없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 내가 그 전에 만났던 남자 이야기를 했었거든. 걔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마고가 캐나다에서 사귀었던 브라질 남자애는
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게 헤어진 이유야, 마고는 그렇게 말했다. 다리를 떨다 오줌이 급해진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이제 가자고 했다. 하이네켄은 반을 남기고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렸다.
오들거리며 도착한 호스텔 앞에는 근사한 맥주집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손으론 맥주잔을 들고있었다. 창턱과 테이블에 걸터 앉은 사람들이 노란조명아래 환하게 떠들고 있었다. 내가 가게를 쳐다보자 마고가 물었다.
“여기서 마실거야?”
“멋지네. 마실까? 넌 어때?“ 내가 말했다.
”나는 잘 몰라. 너에게 달렸어” 마고가 말했다.
갑자기 실증이 밀려왔다. 마고를 잡고 모든걸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이 끌어올랐다. 나는 내 키를 낮추고 마고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녀에게 손가락을 강조해 호스텔과 맥주집을 가르켰다. 내가 말했다. 자 지금 부터 우리는 네가 뭘 원하는 지 차근차근 생각해보는 거야. 저 쪽엔 호스텔이 있고 저 쪽엔 맥주집이 있어. 내 동작에 마고가 웃었다. 호스텔에 들어가면 일찍 잠들 수 있고, 맥주집은 꽤 근사하지만 어느정도 돈을 쓰겠지. 나는 계속 했다. 자 봐봐. 지금 시간은 열한시야. 아마 열두시 정도까지는 바에 있게 되겠지. 알베랑 벤잠도 이곳으로 올지도 몰라. 나는 이 설명을 하는 동시에 마고를 들여보내고 혼자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는데, 그렇게되자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 너도 잘 모르겠지?” 마고가 말했다.
나는 호스텔로 돌아갔다.
둘째날이 밝았다. 구석 침대에서 자던 벤잠과 알베와 제대로 통성명 했다. 우리는 잠도 덜 깬채 밤새 기침을 한 어느 여자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기침은 기침 수준이 아니었다. 구급차를 불러야 할 정도로 기침을 하던 그녀가 기침소리를 내지 않는 때라고는 물을 마시던 순간 뿐이었다. 알베는 그녀가 체크아웃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겉옷이 침대위에 그대로 올려져있는 걸 보고 그녀가 오늘 밤도 여기 묵을거라고 했다. 알베는 경악했다. 벤잠은 침대를 통째로 들어 밖으로 던지자고 했다.
마고는 오늘 뭘 할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 질문에 조금 지쳐있었다. 나는 별다른 계획은 없고 러닝을 할거라고 했다. 벤잠과 알베는 장문의 리스트를 보여주고 서둘러 나갔다. 리스트엔 카페가 세개, 식당이 최소 두개, 나머지 관광 명소가 몇개 있었다. 오후 두시엔 어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네시엔 무슨 다리에 가서 사진을 찍겠다, 라는 식이었다.
“너는 뭘 할거야?” 텅빈 방에서 내가 마고에게 물었다. 마고는 자기도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마고가 생각이 없기는 커녕 아주 많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여행거리를 결정하기 위해 벤잠과 알베와 나의 일정을 먼저 확인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두고 이탈리아애들 처럼 휙 나가버릴까 싶었지만, 내가 스무살일 때 여행에서 만난 수 많은 어른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어리벙벙한 나를 끌고 이리저리 다녔다.
마고는 자기도 러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 캐리어 옆에 벨트와 러닝화가 있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벨트를 들어보였다. 얼마나 뛸거야? 그녀가 물었다. 사십오분 아주 약하게. 내가 말했다. 내가 같이 뛰어도 돼?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말했다. 그녀는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러닝은 저녁에 하고 싶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호스텔 앞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나는 플랫화이트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어쨌든 프랑스인 친구와 함께하니 모든게 수월하긴 했다. 마고가 불어로 주문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어리숙한 면만 가진 건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계산대보다 키가 한참 작았는데 그녀 목소리가 잘 들리도록 계산원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내 음료를 자기가 주문하더니 계산까지 마쳤다. 나는 고맙다고 했고 그 길로 그녀와 반나절을 함께 보내게 됐다.
이제 뭐할거야? 라는 질문은 처음엔 지겨웠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좋은 환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무얼 할지를 러닝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막막한 질문, 그러니까 반드시 대답해줘야 할 것만 같은 그 질문에 비로소 생각이란 걸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챗지피티에게 뚤루즈에서 반나절 동안 뭘 하면 좋을지 물어봤다. 챗지피티는 몇가지 성당과 수도원, 항공우주박물관을 추천해줬다. 나는 그런 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줬고 그녀는 ‘다 좋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데부터 가보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렇게 성세르닌 성당으로 갔다.
성세르닌 성당에 대해선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성당이 무섭지 않냐고 물었던 것, 처녀가 잉태한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던 것, 뮤지엄에서 몇가지 책자를 1유로에 팔았던 것이 생각난다. 성당에서 나와 그녀가 이제 뭘할거냐고 다시 물었을 때 나는 화장실에 갈 거라고 했다.
기차
한 독일인 아저씨와 금발의 유럽 아줌마 두명이 한 껏 들떠 수다를 떨고 있다. 아저씨는 가방에 조개를 세개정도 붙여놓고있는데 적어도 처음 가는 길은 아닌가보다. 그는 신나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떠들고 있고 아줌마들은 눈이 반짝반짝 하다. 아저씨는 아주 가벼워보이는 가방에 샌들과 스틱을 꼽고 있는데 샌들은 슬리퍼 대용인 듯 하다.
“까미노를 뛰던 녀석들이 있었어요. 첫날도 저를 휙하고 지나갔고, 둘쨋 날도 휙하고 저를 지나갔죠. 셋째날부터 그들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아저씨가 말한다.
생장피에드포트
생각보다 한국인이 엄청 많다. 많다고 듣긴 했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한국인을 좀 피하고 싶은데 그건 왜그런 걸까? 사람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건 아는데도 뭐가 다르다고.
성수기에 여행하려면 부지런하긴 해야하나보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내 여행의 무기인데, 문제는 보통 어떻게든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안되면 더 비싸고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두배는 비싸고 후진 숙소에서 잠을 자면 보통은 해결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든 되긴 된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무튼 숙소가 없어서 고생좀 했다. 솔직히 고생은 아니고 숙소가 이리가도 없고 저리가도 없어서 그냥 길바닥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애기들이 맛잇는걸 먹길래 가게에 들어가서 “저기 저사람들이 먹는 젤라또 처럼 생겼는데 뭐 맛있는 달달하고 콘에 달린거 있나요?”라고 더듬더듬 물었다. 점원이 “아이스크림이요?” 란다. 어 네 맞아요 아이스크림이요, 하고 피스타치오 맛으로 달라고 했다. 길가에 앉아서 배낭매고 한스푼씩 떠서 먹는데 솔직히 숙소 걱정은 안들었다. 숙소가 없어서 탄식을 하고 있는 한국인 남자애를 봤는데 그 아이는 육성으로 “아 좆됐다”이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킥킥댔다. 그런 아이를 보면 괜시리 긍정적으로 바뀐다. 피스타치오 맛있넹. 할 수 있는걸 하면 되자낭? 쩝쩝. 이런 생각이었다. 머리속에 하나씩 옵션을 떠올려봤다.
일번, 십만원 넘는 호텔에서 잔다. 지갑은 텅텅비고 꿀잠은 잘 수도 있고 못잘 수도 있다.
이번, 그냥 지금 다음 마을까지 걷는다. 네시간 걸으면 방 있겠지
삼번, 아까 캠핑샵 있던데 텐트를 산다. 호텔방 값 또이또이. 물욕도 채울 수 있음.
뭐 셋다 나쁘지 않길래. 구글링 이리저리 해보다가 캠핑샵 방향으로 향했다. 가장 붐비는 거리에 문이
열려있는 숙소가 있길래 불쑥 들어가 물었다.
“방 없죠?” 내가 물었다.
“하나 있는데요” 아줌마가 말한다.
“도미토리 말이에요”
“하나 있다니까요. 방금 막 취소 된 자리”
호호호 인생이란 어찌나 쉬운 일인지 나는 피스타치오 입맛을 다시면서 바로 33유로 결제했다. 도미토리 25유로에 조식 8유로. 계란 시리얼 토스트 커피 이 모든게 8유로 라니까요. 아줌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고즈넉한 나무건물의 2층으로 향했는데 웬걸, 여기 완전 한인민박이다. 죄다 한국인이다.
몸에선 투쟁도피반응을 일으키는 듯 하다. 우리는 생각으로 과민 반응을 억제 할 수 있다. 그들은 직장 상사와 닮았을지언정 다른 사람이며 다른 순례객들과 마찬가지로 숙소에 묵고 있는데 마침 인종과 언어가 나랑 같을 뿐이다. 내가 하는 목례와 몇사람의 반말 응대는 토종 계급의 발현이 아니고 세대 차이에 따른 의사소통의 방법차이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거부반응은 필요이상으로 과장됐으므로 지난한달간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본 모든 외국인을 떠올려 모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리라,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촤하하하하”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적대감없이 봉쥬르, 올라, 짜오 하던 영혼을 부르려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몇분 안돼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로 이주했고, 얼마전 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산티아고를 혼자 걷는 양평 청년’이 됐다. 아저씨들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같은 방에만 아저씨 열명은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성당에서 왔답니다. 누군가 말했다.
이야기의 늪
이야기를 적다보면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적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걸 이야기의 늪이라고 하자. 돌이켜보면 보통 늪에 빠져있다. 예를 들어 내가 플린을 묘사할 때, 나는 그녀를 조심성이 많고 감각에 아주 예민한 여성으로 적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불편한 다리와 연결시켜서 인상을 받도록 적었을지도 모른다. 마고를 적었을 땐 우유부단하고 미숙한 스무살로 그렸다. 처음부터 의도한건 아니고 적다보면 그렇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녀들의 모습이 그래서가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 가진 인상이 그래서도 아니다. 그녀들은 반대되는 모습을 무척이나 많이가졌다. 누군가에 대해 적다보면 처음엔 그가 가진 여러 얼굴 중 하나를 어쩔수 없이 선택하는 듯 하다. 글자는 글자만큼의 뜻밖에 가질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설명되지 않은 면에 대해서 책임을 덜게되고 결국 그만큼 외면한다 선택된 얼굴이 자생적으로 자기 팔다리를 만들고 새 인물이 되어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이를 교정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교정이 되는 일인지도 불분명하다. 그가 가진 다른 얼굴을 탐색해 수수께끼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 역량 밖이라고 여기고 있다. 혹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감고있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김연수의 <진주의 결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평론가 신형철은 그 소설을 두고 ‘이야기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했다. 언젠가 내가 바라는건 이야기로부터의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