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6-7주차, 순례길
비가와서 뛸 수가 없다. 밀린 글이나 쓰기로 했다.
다시 뛴 지는 닷새째다. 산티아고에 도착하고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지난 한달간 순례길을 걷느라 뛸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순례길에서도 며칠 뛰었지만 정강이 부상을 입고 그만두었다. 매일 걷는 동안 은근히 압박하던 게 두가지 있다. 하나는 뛰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글 써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다. 둘다 거의 못했고, 어떤 면에선 못했기 때문에 무척 좋기도 했다.
쓰지 않고 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은 분명 멋지다. 제주에서 지낼 때 만났던 동화작가 백선생님은 한달간 아무 것도 쓰지 않는게 목표라고 했다. 순례길을 같이 걸은 앨런은 올 가을 뛰지 않기 위해 순례길에 왔다고 했다(그래놓고 하루 55키로씩 걸어댔다). 나는 둘다 쿨하게 내려놓진 못했다. 처음엔 길에서 폰을 잡고 걸으며 이래저래 써댔다. 계속 그럴 줄 알았다. 첫날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핸드폰으로 이렇게 적었다.
< 9/23 출발, 길에서
생장피에드포트에서 배회하던 겨우 몇시간 동안 아는 얼굴을 꽤 만들게 됐다. 소파에 앉아있던 호주 아저씨, 안내소에 줄을 같이 섰던 스웨덴 아줌마 둘, 똑같이 방을 못찾아 전전하던 네덜란드 아저씨. 나는 숙소에서 제일 늦게 출발했고 발걸음이 빠른편이라 그들을 뒤에서 따라잡아 한명씩 인사하게됐다. 새벽5시에 출발한 한국인 무리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새벽 4시에 불을켜고 뚱당거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지져스 크라이스트, 강한 어조가 날라다녔다. 제발 그 불좀 꺼주실래요? 어금니를 꽉 깨문 목소리 주인은 프랑스 아줌마다. 한국인 단체일행이 짐을 챙긴다고 모두가 자고있는 방에 불을 켠 것이다. 아마 그들 가이드는 단체 여행이기 때문에 다른 순례자에게 방해가 되지않기 위해 일정을 빨리 움직이기로 한거 같다. 그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새벽부터 나무장판은 발걸음 마다 삐걱거렸다. 다른 침대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에어팟 노이즈 캔슬 모드를 켜고 수면음악을 켰다. 배게에 이어폰이 눌려 귀가 아플 따름이었다.
내가 느지막하게 잠에서 일어 났을 땐 방에 프랑스 아줌마와 호주 아저씨 밖에 없었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니 그 많던 한국인은 모두 사라졌고, 서양인들이 익숙하다는듯 바게뜨 빵에 잼을 바르고 있었다.
“당신은 한국인이지만 미치지 않았군요” 프랑스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중요하겠어요. 무척 시끄러웠다는
것 밖에!” 뉴질랜드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설렘과 불쾌함은 같은 기분의 두 얼굴 같은 거겠지. 지난밤을 토로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약간은 상기된 떨림을, 출발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은 한국인이지만 미치지 않았군요. 잠을 하나도 못잤지 뭐에요. 내 머리좀 봐 깔깔깔” 프랑스 아줌마는 그랬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3일째 잠을 잘 못잤다는 생각은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시리얼 두종에 우유를 부어먹고 식빵에 계란을 올려먹었다. 사과와 바나나를 먹고 요플레를 까 바게뜨와 함께 먹었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오렌지 한입 마다 커피를 한모금씩 마셨다. 이렇게 많이 아침을 먹어도 되나 싶을정도로 배에 욱여 넣었다.
내 침대에는 한글로 쪽지 한장이 남겨져있었다.
“안전한 여행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새벽에 뚱땅거리며 떠난 한국인 일행 중 한명이다. 박베드로 선생님은 내 발 근처에 쪽지와 함께 봉투를 하나 남겨놓고 나갔다. 봉투엔 닥터유 에너지바 다섯개와 일일 견과류 네봉지가 들어있었다. >
한달 전이다. 박베드로 선생님이 남겨둔 에너지바가 없었으면 그날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먹을거리도 없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순례길을 별 생각없이 덤볐다.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만 가지고 있던 게 이니다. 가능하면 다 걸은뒤 오후에는 달리기를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잘 안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뛰자는 계획도 있었다. 11월에 잡아둔 마라톤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걷고, 뛰고, 쓰는거야, 불과 한달 전에 그랬다.
박베드로 선생님이 건넨 에너지바를 먹고 정확히 하루 뒤, 나는 비센테, 클로이, 앨런과 그룹을 이뤘다. 우리는 수다를 떨어대며 해가지기 직전 까지 걸었기 때문에 당연히 달리겠다거나 글을 꾸준히 쓰겠다는 계획은 보기좋게 어그러졌다. 그래도 처음 며칠 밤은 힘이 남아있어서 이렇게 적었다.
<9/25 수, 소파에서
오늘 하이라이트는 비센트, 클로이, 앨런을 만난 것이다. 비센트는 넉살 좋은 마흔세살 멕시칸-미국인이고, 맨체스터에서 온 앨런과 클로이는 부녀지간이다. 아빠랑 여행 중이야, 클로이가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앨런이 아빠야? 내가 말하자 이미 알던 비센테는 웃었다. 그도 나처럼 커플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빠 앨런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너 러너지? 많이 뛰지?“
“마라톤 뛰지?”
앨런은 너 잘걸렸다, 라는 식으로 나를 잡고 마라톤 기록을 물어봤다. 내 기록은 세시간 이십 일분이고 마라톤은 세번 뛰었죠. 모두 한국이었고요. 당연히 나도 마라톤 기록을 물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앨런은 올 봄 런던마라톤 기록을 보여줬고, 무려 두시간 사십분이었다. 두시간 사십분.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한국에서 작은대회에 우승할 수도 있는 기록이었다. 마라톤 경력은 이십년 차. 나이는 오십이세. 술은 일절 입에 대지않는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으레 러너들이 그러듯 달리기에 관한 수다를 이어갔다. 그도 그랬다.
“난 니 아빠가 너무 좋아.”
우리가 헤어질 때 나는 클로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클로이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정신차리니 다들 잠자리를 준비 중이다. >
이때만해도 앨런, 클로이, 비센테와 그토록 오랜시간을 같이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비센테를 제외하고 마침 모두 마라톤을 즐긴다는 사실은 괜히 그룹을 더욱 돈독하게 했다. 클로이는 이제 한번 뛰어봤고 기록은 세시간 오십분 이라고 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순례자들 보다 긴 거리를 거침없이 걸었다. 그래서 내 일기는 점점 짧아졌다.
< 9/27 금, 다시 밤
정신 차리면 다시 밤이다. 아홉시 사십 칠분. 잘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은 잔다. 며칠 계속 수면이 부족한데, 일과가 정신없이 지나가서 잠이 부족한 지 모르고 지내고 있다. 지난 주차 적어야 하는데.. 그냥 잔다. >
< 9.28 토, 또 밤
젠장 또 다시 밤이네. 오늘은 45키로를 걸었다. 펜션을 하나 잡아서 들어왔다. 우리 그룹은 이제 정말 가까워진 듯 하다. 여전히 영어소통이 조금 걸린다. 다대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물론 의사소통이란 건 한국인하고도 쉽지 않다. 언어의 문제는 아닐지도.
다들 쭉쭉 많이 걷자는 쪽인데 다 걷고나면 녹초가 된다. 뭣하러 그렇게 걷자는 건지 원. 다들 골골대고 있길래 가방에 있던 파스타랑 진라면 두개 끓여서 먹였다. 올리브오일과 마늘, 남은 파스타를 드디어 썼다. 내일은 가방이 한껏 가벼울 예정. 잔다. 지난주차는 패스.>
<9.29 일, 똥싸며
패턴이 굳어진다.
6시에 일어나 양치하고 세수를 한다. 땀냄새가 나는 옷은 그냥 입는다. 껌껌한 밤길을 걷는다. 별 구경을 한다. 정신을 차리면 십키로 정도 지나있다. 카페가 나타나면 까페 꼰 레체와 크루아상을 먹는다. 일출을 본다. 조금 더 지루하게 걸으면 이십키로가 된다. 거리에서 농땡이를 피우며 그 날 어디서 잘지를 정한다. 점심을 먹는다. 간단히 또띠아를 먹거나 배고프면 빠에야나 파스타를 시켜먹는다. 오후 네다섯시가 되면 동네에 도착한다. 만나는 사람은 가리지 않는다. 전에 본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면 신나서 포옹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여러번 본 사람처럼 인사하고 또 만나자며 헤어진다. >
그렇게 첫주는 순례자의 패턴에 적응해갔다. 같이 적응했으니 돈독한 그룹이 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자고, 먹고, 걷는 일. 순례자가 된다는 건 이미 짜여진 하루에 몸을 맞추는 단순한 일이기도 했지만, 하루가 단순해진 만큼 서로가 가진 생체리듬의 차이는 선명해졌다. 그룹이 된다는 건 서로의 속도를 조율하는 일을 수반했고, 간극을 좁힐 수록 우리는 더 달라 붙었다. 앨런과 비센테는 일찍 일어났고 클로이와 나는 늦게 일어났다. 앨런은 아주 먼거리를 걷기를 원했고 비센테 역시 적당한 도전을 바랐다. 나와 클로이는 그만큼 걷고 싶진 않았으면서도 많이 걸어도 체력적 부담이 없는 데다가 성취감이 썩 나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다여섯새를 떠들고 걷는 동안 우리는 같은 날 출발한 다른 수많은 순례객을 지나쳐 며칠 먼저 출발한 무리들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리는 다음 숙소를 같이 알아보는 사이가 됐다.
언젠가 길을 걷는데 클로이가 물었다.
“오즈의 마법사 알아?”
나는 말했다. “마법사?”
“응 오즈. 누구는 머리에 양철통을 쓰고.. ”
나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
“우리가 꼭 오즈의 마법사 같대“ 클로이가 말했다.
나는 내용을 잘 몰랐지만 기억나는 척 했다.
”네가 도로시군”
나는 그때 오즈의 마법사보다는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어딘가 께름칙한 얘기다. 결국 우린 금세 도로시도 하루키도 잊었다. 우리가 다른 순례객들에게 까미노 가족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앨런은 파파, 클로이와 나는 배다른 형제, 비센테는 엉클이 됐다. 앨런은 나를 썬, 이라고, 클로이는 나를 시블링이라고 불렀다.
su papa mi papa, 우리는 이러고 농담했다.
언젠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9/29 토, 밤
넷이 걷다보면 둘둘 찢어진다. 어제는 비센테와 일고여덟시간을 걸으며 수다를 떨었고, 오늘은 빈센테, 클로이, 앨런과 돌아가며 그 시간을 쪼갰다. 셋이 걸을 때도 있고 넷이 속도를 맞춰갈 때도 있다. 누구도 남의 속도에 맞추느라 애쓰고 있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까 눈치보는 경우가 없다. 에스테라(Estela)라는 마을을 만났을 때 비센테, 클로이와 나는 성당을 구경하느라 길을 새버렸다. 그 동안 앨런과 테리는 멀리 가버렸고 우리는 세시간 정도 뒤에 다시 만났다.
대화의 대부분은 빈센과 클로이가 차지하고 있다. 끼어들만큼의 영어가 안돼서 많이 아쉽다. 이 친구들, 내가 자꾸 못알아 듣는다고 말해도 완전히 알아 듣는줄 알고 있다. 나는 머리 한켠에서 이렇게 지내면 한달뒤에 영어가 늘까? 고민하고 있는데, 결론은 전혀 아니라는 것. 공부하지않으면 그대로겠지. 지난 브런치에 올린 글을 챗지피티에게 부탁해 영어로 바꿔 달라하고 그걸 혼자 읽으면서 걸었다. 내가 자주말하는 문장 패턴이 글에도 남아있겠고 읽다보면 발화에 각인되지 않을까. 됐다. 자야지 무슨 공부냐. 걷는 동안은 좀 내려놔야지.
앨런과 걷다말고 달리는 영상을 5초정도 찍었는데 나보다 앨런이 더 맘에 들어하는 듯 하다. 영상을 보내달라고 하더니, 내가 잊고있자 또 다가와서 자기번호를 입력하고 빨리 보내라고 한다. 우리는 장난 삼아 나를 앨런의 스텝선, 그러니까 양아들로 부르고 있다. 둘다 러닝에 미쳐있고 그의 딸 클로이와 유일한 또래니까.
“헤이, 아들놈아. 빨리 보내라니까”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
앨런과 나는 당연히 러닝 얘기로 친구가 됐다. 아니 양부자지간이 됐다. 앨런은 서른한살에 첫 마라톤를 뛰었다고 한다. 그런 앨런은 ”너가 나보다 더 기회가 많아“ 라는 말을 여러번 했다. 그는 러닝얘기를 할때면 자연스레 억양이 세지고 말이 빨라져 내가 여러번 다시 물어야 했다. 나는 “당신이 한국에 오면 어떤 대회에선 우승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앨런은 자기보다 못뛰는 친구와 경쟁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번 할 정도로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맘에 들었다. 러닝에 미쳐사는 그는 젊은 시절엔 여러종류의 중독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십년전 그가 중독의 대상을 바꾸기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었겠지.
“나는 지난 서울마라톤 38키로 지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마라톤은 응원 존이 있어요. 큰 대교를 건널 때였어요. 몇분 동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수십명의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뛰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당신도 그 기분을 알죠? 어쩌면 마약과 똑같을 지도 모르죠”
나는 앨런에게 말했다.
”실제로 똑같아“ 앨런이 말했다. >
나는 많은 시간을 클로이와 걸었다. 아무래도 또래이기도 하고, 앨런은 주로 앞서서 걸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보통 클로이일 경우가 많았고 때때로 비센테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사람을 뒤죽박죽 섞어서 걸었지만 지금 떠오르는대로 기억하자니 그렇다는 것이다. 비센테는 앨런과 우리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한 듯 하다. 그가 중간 나이대 이기도 했고 그가가진 원만한 성격과 체력으로 그룹의 윤활제 역할을 했다.
클로이와 긴 시간을 함께 걸은 날, 하루는 이런 일기를 썼다.
<9/30 일, 밤
여섯시에 겨우 일어나 여섯시 삼십분에 출발했다. 지금 까지 중 제일 이른 시간이다.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다. 클로이가 흔들어 깨웠다. 물론 자던 상태라곤 할 순 없었다. 잠은 거의 못잤기 때문이다. 지난 밤에 아주작은 맥주 한 컵을 먹어서 그렇다. 술집에서 레알더비를 구경하는 비센트 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1유로 짜리 맥주하나 얻어먹었다. 뭐 여기선 피곤하든 말든 별 신경 안쓴다.
아무튼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 한 덕에 어두운 까미노 길을 한시간 정도 걸었다. 별이 쏟아졌다. 나는 별똥별을 네개를 봤고 클로이는 하나도 못봤다. 우리가 별구경 하느라 앨런, 빈센테와 멀어졌고 그대로 거리가 꽤 벌어졌다. 나중에 밥먹을 때나 잠깐씩 보게 됐다.
클로이와 오랜 시간 같이 걷는데엔 익숙해졌다. 그녀는 나에게 말할 땐 느리게 말한다. 우리는 가끔 노래를 듣거나 헛소리를 하는 식으로 시간을 때웠다. 카페나 바가 나오면 커피를 또 먹고 또 화장실에 가댔다. 클로이 말을 못알아 듣겠으면 못알아듣겠다고 하거나 알아듣는 척 했다. 오늘은 풍경이 꽤 지겨운 편이었다. 대부분 거리를 두고 앞뒤로 걸었다. 앨런과 비센트는 잡힐만 하면 사라졌다. 앨런은 자기 딸을 나에게 완전히 맡겨둔 듯 식사만 마치면 사라졌다. 이따 보세 클로이, 하고 머리에 입맞춤을 하고 가버린다.
얼마나 걸었을까. 식당에서 앨런과 비센테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우리보다 삼사십분 먼저 도착해서 끼니를 이미 때운 상태였다. 늘 이시간이면 해야하는 결정이 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가서 어디서 잘건데?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 묵을 곳을 정해야 한다.
“우리 어디까지가” 누군가 말했다.
나거나 클로이거나.
“부르고스” 다시 누군가 말했다.
빈센트나 앨런이 대답했을 것이다.
선발대 두명은 여러모로 얘기를 끝낸 상태였다. 부르고스는 남들이 이틀걸려 가는 거리였다. 새벽부터 25키로미터를 걸어 점심을 먹을 식당에 도착했는데, 25킬로를 더 가자는 얘기였다. 이때부터 클로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질때 까지 걸어서 거기에 가야할 이유가 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오늘은 흘러가는 대세에 맞추기로 했다. 앨런은 다시 한번 클로이의 머리에 키스를 하고 떠났고 비센테도 서둘러 가버렸다. 그들은 진심으로 부르고스에 가고싶은 것이다.
나랑 클로이는 볼로네제 파스타를 시켰다.
“어디까지 가요?” 다른 테이블에서 어느 순례객이 물었다.
“부르고스요” 우리가 말했다.
“아니 오늘말이에요. 어디까지 가요?”
“오늘 부르고스 까지가요” 우리가 다시 말했다.
“진짜에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이 대화를 가지고 두고두고 웃었다. 우리는정상적인 속도로 걷고있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는 싸이코 패쓰(Psycho paths)로 우리를 불렀다. 뛰지 않는게 다행일 정도였다. 이렇게 그룹이 된 것도 웃긴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세시간을 걸은 뒤 결국 멈췄다. 앨런 역시 햇볕에 이미 통구이가된 클로이를 데리고 네시간을 더 걷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앨런과 클로이와 나는 숙소에 체크인했고 비센테는 가던길을 계속 갔다. 57키로를 걸어 부르고스에 도착한 비센테는 도시를 즐기기도 전에 녹초가 돼있었다. 다시는 이렇게 안할거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걷는 정도의 차이는 이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드러날 일이었다. 모두가 마음에 드는 마을도 다르고 멈추고 싶은 때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이때부터 고민을 시작한 듯하다. 돈독해진 이 그룹에 언제 까지 속해있는 게 좋을까. 이렇게 끝까지 같이 걷게 되는 걸까. 앨런 부녀는 비행기를 타야할 날짜가 있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치고 나가는데 집중했다. 나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오후의 일과를 느긋하게 즐기며 순례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걷는 속도를 줄여야만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던 어느 날은 클로이도 그랬던 것 같다.
<10/1 밤 21:55, 자기전에 요가매트에 누워서
오늘은 3km를 뛸 수 있었다. 점심에 걷기를 멈췄기 때문이다. 맘같아선 더 뛰고 싶은데 비가와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슈퍼와 약국에 뛰어갔지만 시에스타라 모두 문을 닫았다. 어쨌든 오후가 길어 이렇게 일기도 쓸 여유도 있다.
오늘은 기억에 많이 남을 듯 하다. 순례객이 모두 모여 6시엔 다같이 명상을, 7시엔 채식 저녁식사를 했다.
클로이가 아니었으면 오늘 숙소에 체크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왔다. 발이 무거워지고 몸이 젖었다. 지나가다 열려있던 명상센터 비스무리 한 곳에 잠깐 머물러 들어왔는데, 클로이가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자고 제안한 것이다. 오늘 걸은 거리가 2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앨런은 눌러앉은 그녀를 재촉했다. 클로이는 반박했다. 두사람의 억양이 거세졌다. 부녀간의 대화가 날이 서는 동안 나와 비센테는 자리를 떴다. 날카로운 대화가 마무리 될 동안 커피를 한잔 더 마실 수 있었다.
대화를 마친 앨런이 나타났고 클로이는 사라졌다. 둘다 화가 많이 난 듯 했다. 나는 내심 여기 머물길 바랐다. 명상과 요가를 같이하는 숙소였다. 지난 며칠 나는 여유로운 오후를 바랐다. 클로이는 앨런을 못이겨 심술이 난채로 멀리 다음마을로 걸어가버렸다. 결국 앨런은 나와 비센의 의견을 묻고 이 마을에 멈추는 데에 동의했다. 클로이는 다시 돌아왔다.
6시 명상. 호스트 ‘킴’은 돌아가며 자신의 까미노가 무엇인지 나누자고 했다. 아내를 잃은 제이비가 깊은 슬픔을 내놓은 순간부터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그가 자기 비통함을 툭 꺼낸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옆에는 가방에서 휴지를 찾아 건네던 아미카상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됐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명상이 끝나고 내가 했던 말들을 클로이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영어를 더듬거리며 맞는 낱말을 집어내는 동안 나는 낱말을 찾는지 내가 하고싶은 말을 찾는지 헷갈렸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나도 내가 여기 왜 왔는지는 잘 몰라. 한국에서 까미노는 꼭 상식같은 거지. 여행을 좋아하면 한번씩은 들르는 유행이라고나 할까. 내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겪게 될줄은 생각하지 못했어. 여기엔 수만가지의 이야기가 수만명의 사람들에게 열려있어. 나는 이제 그들을 들을 수 있고 나에 관해 쓸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역설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나에 관한 과생각을 드디어 멈출 수 있지“
졸리다. 메모. 케이트는 어머니를 잃었고. 제이비는 아내를 잃었다. 얀 역시 아내를 잃었다. 얀은 울먹거리며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부다 얘기를 했다.
식사를 치우기 전에 제이비와 이런 대화를 했다.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요”
“나는 좋은 사람이었네”
“아뇨 지금도요”
“고마워” 제이비는 눈물을 흘렸다
머쓱해진 그는 말했다.
“자네처럼 뛰어다니면 더 좋은사람이 될거같군” >
일찍 숙소에 도착하면 10분 정도씩 뛰었다. 다리 피로도가 생각보다 높아 더 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가방이송 서비스를 이용해서 까미노를 몇번은 뛰려고 했다. 막상 걸어보니 좋은 생각이아니었다. 같이 걷고 떠들고, 오늘도 까미노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뛰어서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같이 걷고있는 앨런, 클로이, 비센테와의 이야기가 재밌기도 했다.
레온을 앞두고 삼사일 정도는 지루한 길이 반복됐다. 이 지루한 길을 두고 ‘마세타’라고 부른다. 차도 옆으로 나있는 평탄한 길이 수키로씩 이어졌다. 풍경은 바뀌지 않았고 날은 더웠다. 자동차 소리에 귀가 아팠다. 어느날 거기서 33km를 걸었다. 목표까지 7km를 더 가야했다. 나는 그때 마을에서 마을 사이를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방은 9키로 정도로 심하게 무겁지 않았다. 장교훈련단에서 금요일마다 뛰던 전투뜀걸음을 생각하면 배낭이 있는게 더 즐겁기도 했다. 나는 마지막 마을을 앞두고 클로이와 비센테와 앨런과 길바닥에 쉬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 뛰어간다”
비센테는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들을 모두 먼저 보냈다. 나는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바지를 러닝바지로 갈아 입고 선글라스를 꼈다. 스트레칭을 십분정도 했다. 배낭을 매니 더욱 신이났다. 이어폰을 낄까 했지만 내 발소리가 더 흥겨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동네바깥으로 질러나갔다. 배낭 무게만큼 중력을 견디는 허벅지 근육의 느낌이 ‘맛있었다’. 나는 비로소 ‘마세타’를 내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평탄한 만큼 뛰기 좋았다. 가방이 뒤에서 흔들리면 그만큼 근육을 잡아야 했으므로 비로소 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클로이와 비센테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멀리 앞선 앨런도 내게
달려, 달려, 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렇게 40분을 뛰어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티셔츠와 가방은 흠뻑 땀에 젖어있었다. 나는 물을 500미리 한통 사 전부 다 마셨다. 친구들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나는 도착, 어서와, 멋진 알베르게군.
나는 그날 밤 열한시경 내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침대에 누웠는데 정강이 바깥쪽 근막에 타들어가는 작열감이 느껴졌다. 커터칼로 얇게 도려내면 그런 느낌일 것이다. 부상을 입었을 때 내가 발휘 하는 첫번째 원칙, 대수롭지 않게 여기되, 적극적으로 쉴 것을 주문했다. 실제로 신경쓰면 더 아프고 아프면 악화되니까.
내 주문이 통했던 건지 이튿날은 크게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삼십키로 정도를 다시 걸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은 (당연히) 아팠다. 나는 대수롭게 여기기로 했다. 이건 치료를 필요로 하는 분명한 부상이었다. 그 당시에 적은 일기는 이렇다.
<10/4 금, 밤
처음으로 부상기가 있었다. 약을 먹으니 이래저래 낫긴햇다. 그저께 신나서 뛴게 문제가 됐다. 지금 조금 욱신거리는 건 사실이다.
저녁이 정말맛있었다. 나는 여태중 최고다. 동시에
배부르고 맛있게 먹는데 소냐생각도 났다. 돈없이 순례하는 소냐, 나는 그녀 입장에 조금도 서볼 수 없다.>
<10/4 토
아싸 나이스 호스텔이다. 정신차리고 씻고 밥먹으면 잘시간. 비센은 우리를 떠났다. 계속 이렇게 늦게까지 걸을 순 없었을 것이다. 요즘 머리속엔 너무 많은 생각이 있다. 앨런, 클로이 좋지만 계속 이렇게 걸어도 되는 걸까? 부상은 심해질까? 언제 뛰지?>
<10/6 일, 드디어 레온.
짦게 걸었지만 통증이 커졌다. 걷는 내내 통증에 대해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속도도 매우 느렸고, 특히 내리막은 쥐약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부상 우울감이다. 물론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걷는 내내 내일은 앨런 클로이와 작별 할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영어로 더 이상 스트레스 받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남이보면 의아할지도. 니가 언어로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아무튼 부상은 여러모로 과생각을 만든다.
레온엔 한시쯤에 도착했고 케밥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하루가 갔다. 앨런과 클로이에게 내일은 쉰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몇키로를 걷던지 24k나 31k정도만 걷겠다. 작별이 다가오고 있긴 하다. 헤어지는건 아쉽지만 새사람들을 만나고 싶기도 하다. >
<10/7 월,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
쉬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하루 더 가기로 했다. 32키로를 걸어 도착한 여기는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 레온 뒤로 숙박하기로 가장 유명한 동네다. 오늘도 역시 머리속에 온갖 영어들을 집어넣어기며 걸었다. 팟캐스트를 한두시간 가량 듣기도 했고 혼자 하고싶은 말을 영어로 주절거리기도 했다.
그건 그거고 가장 먼저 적을 거리는 부상. 밤에 소염제 두알을 먹은데다가 다리를 열심히 올리고 자서 그런지 무척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마을을 한두시간 남기고 부턴 아니었다. 찌릿하는 통증을 한번 느낀 이후로는 어제만큼 아니 어제보다 더 심해졌다. 내리막 길은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까미노를 중단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마라톤이 3주밖에 안남았는데.. 만일 포르투 마라톤을 못뛰면 어떤 식으로 자기최면을 만들어둘까 계산하기도 했다.
마지막 한시간 동안 내일은 숙박을 하루 연장할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난 13일간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 앨런 클로이와 헤어지게될 터였다. 웃긴일이다. 나는 그들이 영국 영어, 그것도 맨체스터 사투리로 대화하고 있으면 끼기는 커녕 대부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나름 깊은 관계는 형성해왔지 싶다. 섭섭함과 후련함이 같이 떠오른다. 계속 같이 걸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과 혼자만의 시간을 이제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든다. 앨런과 클로이는 피스테라 까지 걸을 예정이기 때문에 지금 헤어지더라도 삼사일 늦게 산티아고에 도착해 피스테라에 버스타고 간다면 또 만날수 있다. 말도 안통하는 애들과 무슨 정이 들었다고 이런 계산을 하고있는지 좀 어이가 없긴 하다.
호주 여자애 포피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너의 워킹은 어떻게 되어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장을 미뤘다. >
그 때 정강이 회복을 위해 멈춘 동네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정말 멋진 동네다. 중세에 세워진 다리와 성당이 아직도 동네 풍경을 이루고 있다. 숙소로 정한 ’알베르게 베르데‘역시 채식 위주의 마음편한 숙소다. 요가를 할수있는 장소와 매트를 구비하고 있다. 나는 이곳을 만나자마자 하루 휴식에 걸맞겠다고, 하루 멈추기로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전 부터 생각한거야, 지금 아파서 그런거야?”
앨런은 그렇게 물었다. 내가 떨어지기로 한게 섭섭한 눈치였다.
”오늘 오후 한시쯤 부터는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어“ 그렇게만 말했다.
앨런은 나를 안았다.
나는 앨런, 클로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지막 저녁은 숙소가 제공하는 비건식이었다. 나는 몸을 가볍게 만든다는 기분으로 지난 이주를 돌아보았다. 기적같은 시간이었다. 앨런, 클로이, 비센테와 순례길의 절반을 어떻게 같이 걸었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일단 멈추고 싶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싶어서도, 부상이 심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나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보고 싶었다. 마침 부상이 찾아와줬을 뿐이다.
그날 저녁 밖에서 일기를 쓰는데 클로이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어디냐. 너를 놀래켜줄 과자가 있어“
나는 거실로 올라가 그녀가 어디선가 가져온 초코렛을 먹었다. 우리는 그녀 여동생 사진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