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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Oct 27. 2024

냉찜질, 파울로 코엘료, 뛰어갈 거예요?

여행 8-9 주차, 순례길2

까미노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적고싶지 않다. 세상엔 그런 수기가 너무나 많다. 특히 한글로 된 이야기는 정말이지 많다. 정강이 얘기나 조금 더 해야겠다.


앨런과 클로이를 떠나보내고 ‘알베르게 베르데’에

하루 더 묵었다. 한 숙소에 하루 더 묵는다는 건 열댓명의 순례자들을 더 만난다는 걸 의미한다. 묵는 숙소와 동네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까미노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구면이 된다. 초면이라해도 나에게 구면인 누군가에게 구면이므로 모두가 금세 친구가 된다. 나는 한 숙소에서 이틀을 묵었으므로 까미노 친구를 이틀간 양산한 셈이다.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연박하는 이유를 간단히 소개하게 됐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원래는 친구들과 함께 걷고있었어요. 어느날 너무 뛰고 싶어서 다음 마을까지 뛰었습니다. 그날 밤 정강이 통증이 시작되더니 며칠이 지나니 못걸을 지경이 되더군요. 그래서 친구들은 보내고 여기 하루 더 묵고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마주치는 순례자들은 나에게 정강이를 물었다. “정강이는 좀 어때요?” 하루에 세번씩 그 질문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나는 하루 쉬면서 순례길 두번째 장막이 시작된다고 여겼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걸은 게 첫번째 장이라면 혼자 걷는 내일부터가 두번째다. 그날 적은 일기는 이랬다.


< 10/8 화, 정원에 앉아서 냉찜질

전혀 걷지 않는 날은 처음이다. 평소면 이시간에 20k정도 도달했을 시각이다. 오늘은 빈둥대며 조식을 먹고 다시 빈둥대며 커피를 마시러 중심가에 나갔다. 마트에서 냉동식품을 사서 들어왔다. 텅빈 호스텔은 네다섯명의 봉사자들만 남아있다. 그들이 청소하고 있는걸 보고있으면 제주에서 스탭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이스라엘 여자 네명은 무슨 이유로 여기서 스탭을 하고 있을까? 무슨 이유로 이토록 친절할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내일부터는 혼자 걷는다. >



그러나 곧 비센테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두시간 후면 도착이야” 며칠전에 헤어진 비센테와 테리가 내가 있는 숙소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까미노에서 혼자가 된다는 건, 적어도 프랑스 길에서 만큼은, 쉬운 일이 아니다.



< 10/9 수

처음으로 배낭없이 걸었다. 마라톤이 우선이다.  6유로 주고 다음 숙소로 차에 싣어 보냈다. 거리도 짧게 20k만 걸었다. 혼자 걷길 기대했지만 비센테와 걸었다. 그것도 썩 나쁘지 않다.


정강이 염증, 신스프린트라고 부르는 이 부상은 꽤 흔하다. 요즘은 매일 한명이상 만난다. 어제 묵은 숙소에도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둘 있었다. 다들 증상이 어떻고 원인이 어떻고 아는대로 설명하기 바쁘다. 그냥 가방매고 뛰는 바보짓을 해서 그렇다. 과하게 사용하면 염증이 생긴다. 더 필요한 말이 없다.


처음 며칠은 마라톤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부상도 며칠 지나니 그런가보다 싶다. 하루만에 낫는 부상은 없다. 늘 이랬다. 분명한건 안쓰고 관리하고 약먹으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통증에 크게 마음쓸 필요가 없다, 라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낫다. 내일은 아마 조금더 낫겟지. 안나으면 뭐 어쩌라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비센트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제좀 혼자 걷나 싶었는데, 같은 숙소에 비센트가 나타나서 조금 김이 샜다. 반가운건 사실이지만 어제 오전에 클로이와 앨런이 떠난 이후로 머리속에 의사소통 스위치를 껐다. 며칠동안 맨체스터 엑센트로 튜닝을 해놨더니 갑자기 캘리포니아 영어가 훅 들어온다. 오늘도 혼자 걷긴 글렀군. 아침에 똥싸는데 비센트가 기다리고 있다. 나 20k만 걸을 건데 괜찮아? 비센트는 괜찮단다. 그래서 20키로 내내 같이 걸었다.


어제 밤 브라질 아줌마 베티나가 친구랑 같이 걷는 일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말 하려는지 우리는 다 안다. 계속 일정을 맞추려는 압박을 가져야하고, 걷는 페이스도 다른데 맞춰야하고, 식사와 똥 타이밍, 언어문제, 그렇게 하나씩 짚지 않아도 우리 순례객들은 까미노에서 동행가지는 문제의 단점을 아주 잘알고 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러다가 끝까지 같이걷는거 아냐? 지금은 그냥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 마저 까미노 이겠거니. 인간이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는게 과연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나는 어쩔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에 이르러야 비로소 내가 찾아지기도 해요“ 머리 속으로만 말했다.


퍼피도, 앨런도, 클로이도, 같이 걷는 비센도, 어제

밤 숙소에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뉴질랜드 아줌마니키도, 그 앞에 있둔 호주 할머니도. 내 정강이가 어떠냐고 묻는다. 솔직히 그만큼 다친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다. 내 대답은 거의 똑같다.


”완전히 괜찮진 않지만, 그리 나쁘진 않아. 솔직히 순례길을 걷는덴 별 지장이 없지. 마라톤 때문에 조금 불안한건 있어. 멘탈은 정말이지 아무 문제가 없어. 요즘 왜 자꾸만 상기가 되는지 모르겠어. 여기서 겪는 멋진 일들을 생각하면 말이야”


결국 내일도 비센테와 함께 간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엔 사라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사라 이쁘당. >



< 10/10 목

빈센테와 33키로를 걸었다. 여전히 가방 없다. 통증은 어제보다 낫지싶다. 오늘 오전까지는 느껴졌는데 오후부터 없어졌다. 바라건대, 모레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까 싶다. >



없어지기는 커녕 결국 다음날 하루 더 쉬었다. 8키로만 걷는 날을 만들었다. 통증을 완전히 죽여야 하기도 했고, 완전히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비센테는 아쉬워 하며 다음 마을로 먼저 떠났다. 그가 먼저 일어나 새벽에 짐을 싸는 동안 나는 작별을 기다렸다. 곧 보자고 리틀 호미. 비센은 내 어깨를 두들기고 홀연히 나갔다. 곧 따라잡을게. 나는 말했다. 다시 누워서 아홉시까지 잤다. 가장 아름답다던 마을 몰리나세카에서 였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됐다. 순례길을 시작한지 열일곱날이 지나서 였다. 혼자 지낸 이래로는 일기를 쓸 수 있었다. 아래는 며칠간의 기록이다.



<10/11 금, 낮잠자고 소파에서

숙소 체크인. 두시간 낮잠. 꿀잠. 핸드폰은 꺼버림. 파울로코엘료의 연금술사를 펼쳤다. 다시 핸드폰을 키고 다음 일정 고민. 온갖 경우의 수를 펼치다보니 한시간이 훌쩍 가고 머리가 복잡. 역시 핸드폰 꺼뒀던 시간이 하루 중 최고다. 샤워 후 조금 빈둥대다가 나와서 스파게티와 스테이크 혼자 먹음. 17.95유로. 뷰좋은 벤치에 앉아있는 중. 앞에 성당과 다리가 보인다. 팔백년은 먹었겠지.


인스타로 만두사장님과 수다떨다가 결국 잘시간.여섯시 이후로는 향후 일정이 항상 머리속에 큰 이슈. 내일은 32를 걷는다. 아무 부담이 없다. 아무 통증도 없기를. 아니 있어도 됨 >


<10/12 토, 논알콜

논알콜 한잔 시켜놓고 펍에서 오늘 요약. 새로운 풍경, 가방은 없음, 정강이는 괜찮아지는 중, 다음 일정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 싸고 맛난 커피지만 오늘은 디카페인으로만. 점심은 스테이크 성공. 고양이와 일분간 같이 걷기.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아메리칸-브라질리안 가족들과의 짧은 수다. 한강이 핫하다.


김창완이 한강에게 ”요즘 관심사가 뭐에요?“ 물었다.  나의 오늘 관심사는 무엇?


첫째, 부상. 양가적이다. 신스프린트로 인해 마라톤이 영향받을까 불안한 마음과 이따위 것 부상일 뿐이라는 것. 더이상 할말은 없다. 점심먹은 이후로는 확실히 나아졌다. 이유는 모르겠음. 나아질때가 되긴 했다. 처음 통증을 느낀게 10월 3일이니까.. 9일전이네. 헐. 엄청 오래됐네. 뭐 처음느끼고 며칠은 막 다뤘으니까 회복이 시작된건 삼사일밖에 안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중요한건 오늘 꽤 괜찮아졌다는 점이다.


근데 부상따위, 괜찮지 않으면 뭐 어쩌겠단 말인가?


둘째, 저녁식사때마다 와인이 골치다. 와인이나 물 선택. 똑같은 가격에. 메뉴판 마다 이렇게 써있는데 물을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다. 지난 이틀은 이를 악물고 물을 달라고 했다. 오늘은 다리도 썩 괜찮은 편이라 그냥 와인을 달라고했다. 조금만 주세요, 라고 말했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병으로 줍니다 원하는 만큼 알아서 드세요, 라고 커다란 와인 유리병을 하나 가져다 준다. 가만두면 다 마실까봐 테이블 멀리 치워놨다. 와인잔에 소주한잔만큼만 따라 마셨고 결과적으로 소주 세잔만큼 와인 마셨다. 더 멀리 치워놨어야하는데.>


<10/13 일, 라파바

짧게 걷는 날, 돌아온 가방, 그러나 돌아온 약간의 통증, 걱정은 없음, 안개낀 아름다운 아침, 드디어 해가 떴다, 업힐은 나를 들뜨게 만든다, 평화로운 두번째 공립알베르게.


홍콩 여자애 샘이 쫄쫄 달려와서 이것저것 말 걸었다. 앨런이 옛날에 말걸어서 안면을 튼 사이인데, 최근에 내가 속도를 줄이면서 계속 마주치고 있다. 인사만하고 헤어졌는데 오늘은 와다다다 달려오더니 궁금한게 있어요, 당신은 “오빠”이겠죠? 란다. 그녀가 아는 한국어는 오빠, 아줌마, 아저씨, 제주도. 한국 드라마를 많이봤단다. 일주일에 몇번은 한국드라마 잘보는 사람 만나는 듯. 그냥저냥 가다가 헤어졌다. 아참, 내가 배고파하니까 가방에서 커다란 바게트빵을 꺼내서 줌. 너무 무거우니까 먹어달란다.


오르막을 만나고 무척 들뜬 건 사실. 평지보다 더 빨라지는 거같다. 양평 국수리 고개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남들이 보면 뛰는거 같았을 수도 있다. 최고의 날씨, 최고의 햇볕, 살짝 젖은 진흙이 발에 촉감을 살려준다. 물이 졸졸 흐르고 새소리나 밤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주 빠르게 걸었다. 이때부턴 통증도 신경 쓰이지않았다. 내일도 오르막이란다. 맘같아선 가방매고 운동하고 싶지만 참는다.


알베르게는 매우 괜찮다. 두번째 공립이다. 공립이 대체로 친절하다. 무엇보다 1시에 도착해 햇살드는 알베르게에서 하는 빨래는 큰 기쁨이다. 손 빨래 햇살이 널고, 헐떡대고 도착하는 순례자들 구경했다. 폰 한시간 꺼놓고 연금술사 읽었다. 비치된 차 여러번 따라 마셨다. 그림자 방향이 바뀔때 마다 빨래위치를 바꿔서 매달아 두었다.


점심 저녁을 두끼나 한곳에서 사먹었다. 맛은 별로였지만 기분이 계속 좋다. 내일도 25만 걷는다. 가방까지 없기때문에 더 수월할 예정. 모레는 아무 통증도 없었으면 좋겠다. 빅데이를 위해. >


라파바


<10/14 월

오늘 세번째 멈추고 있다. 가방을 다시 차에 싣어보냈다. 무척 가볍다. 거리도 25키로만 걷는 날이라 부담도 없다. 여전히 신경쓰이는 건 신스프린트. 낫고있다는 생각은 드는데, 완전히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보채고 있다. 오렌지 주스 마시며 앉아서 냉찜질 하는 중이다. 밤중에 물병을 얼려둔게 생각보다 쓸모가 있다.


오늘의 칭찬은 스트레칭 20분 하고 출발했다는 점. 염증이 신경 쓰여 다시 가방없이 걸었다. 역설적으로 짐이 가벼우니 더 많이 쉬는 듯하다. 총 네번 멈췄고 커피는 세잔, 오렌지주스 한잔, 커다란 또띠아 두개(하나는 성인 머리통보다 컸다). 거대한 샐러드와 지금 중 최고인 볼로네제 파스타 먹었다. 이러니 결국 네시넘어 도착할 수 밖에. 중간엔 마라토너 부부와 만나서 즐겁게 인사했다. 아이싱을 하던 나를 보고 그들이 먼저 말을 걸었는데 자연스레 서로 러닝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최근 며칠 이런식으로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 듯 하다. 여전히 만나는 사람마다 내 정강이가 괜찮냐고 묻고 있다. 오늘은 비건 호스텔에 체크인 했고 사라를 우연히 또 다시 만났다!


아참, 오늘의 하이라이트. 식당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애랑 통성명을 했는데 몇시간 뒤 그녀는 길바닥에서 체크카드를 하나 주웠고 마침 내꺼였다. 우연히 같은 숙소였던 덕에 그녀는 주인을 찾아줬다. 땡큐 미건.


저녁식사는 비건. 비트뿌리로 끓인 수프와 야채섞은 현미밥, 그안에 크림같은건 뭔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었다. 앞자리 사라와 늘 그러던 대로 수다를 떨었다. 옆자리 독일 남자애, 말많은 스페인 아저씨, 왼쪽 캐롤린, 케이티와 수다를 열시까지 떨었다. 나름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아무튼 주제는 이랬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10/15 화

혼자 걷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늘만난 사람은 5분정도 같이 걸은 네덜란드 애런. 그는 무척 진지한 친구였고 지난 5개월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수다쟁이 브라질 아줌마 베티나와 인상좋은 영국 할머니 캐롤린도 다시 만났다. 잠깐 앉아서 점심식사를 함께했는데 아줌마가 역시나 입을 닫지 않았지만 난 꽤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할 듯.


아 참, 점심으로 얆은 스테이크와 빠에야를 먹었는데 아주 괜찮았다.


아 참 또, 아침 식사 도나티보 카페가 기억에 오래 남을 듯 하다. 기가막힌 케이크와 친절. 지폐가 너무커 남은 동전을 털어놓고 나왔다. 지폐를 쾌척할 배짱이 있으면 좋으련만.


두시가 넘어가면 여러모로 지루해진다. 사람도 잘 안보이고. 오늘도 잉글리시 팟캐스트 들으면서 마지막 한시간 때웠다. 대채로 거리는 긴데 늦게출발하다보니 오후가 남들보다 지루한 편인 듯하다. 게다가 오늘은 걷다가 졸았다. 거제 트레일러닝이 생각났다.


아무튼 도착해서 만난 호스텔은 썩 괜찮은 편. 스코틀랜드 아저씨가 대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냐고 묻는데. 사실 똑같은 스몰토크를 거의 한달 째 하고있기 때문. 오늘 나도 모르게 영어가 술술 나온건 사실이다. 아유 별말씀을, 저 영어 못해요. 방금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팟캐스트 들어서 그런거에요, 라고 말했다. 아주 인상적이구만! 아주 인상적이야! 훠훠훠 하고 웃는다.


저녁식사는 훌륭했다. 양이좀 적긴 했지만 난 좀 적어야 한다. 점심을 배터지게 먹어서 아쉬움은 없다. 기억에 남는 건 순례객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그야말로 가득하다) 스위스 아줌마가 기억에 오래남을 듯하다. 그녀는 얼마나 비판하고 싶은 대상이 많았는지 크게 화가났다. 뛰는 사람, 길게 걷는사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 사리아부터는 가짜 순례객이 많다고. 지나가는데 ‘부엔까미노’도 안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뛰는 사람을 비판할 땐 조금 뜨끔 했는데 그녀의 반전에 안심했다. 반전은 정작 그녀는 비맞는게 너무 싫어서 내일은 택시를 탈거라는 것.


싱가폴 여자애,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정말 특이하네. 만난지 5분만이 “내일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까!”라고 묻는다. 음.. 스위스 아줌마처럼 되지않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많은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같은 숙소로 짐을 부쳤다.


<10/16 수

눈뜨자마자 잘잤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이미 일곱시였다. 스위스 아줌마가 코를 기운차게 골았는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고 나를 방해하진 않았다. 노이즈 캔슬 이어폰 끼고자는게 꽤 괜찮다.


어제 비센테가 전화가 왔다.

”브로. 테리와 나는 걷는 속도를 줄이고 있어. 너랑 같이 산티아고에 들어가고 싶거든. 적어도 마지막 밤은 같이보내자. 너는 내 까미노의 큰 부분이거든“


비센테가 큰 부분인건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브로. 너가 기다리면 60k도 걸을 수 있지. 씨유”


어제 수미가 인스타에 올린게 기억이 난다.

“혼자 있기 실패. 제이비가 다 끌어모음”


까미노는 혼자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요. 나는 그녀에게 장난스레 말했만 진심으로 그렇다. 어디 까미노만 그런가, 살면서 남을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단다. 어쩌면 남이 없는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기어코 남을 피할수 없다. 원치않는 관계를 피할수ㅠ없다. 코골이도 피할수 없다. 내가 여기서 나로 존재하는 방식은 그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해졌다. >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리아부터는 순례객의 양상이 바뀐다. 일단 사람이 무척많다. 당일치기 순례자도 많다. 삼사일만 걷는 구간 순례자도 많다. 예전에 만났던 많은 구면 순례자들을 여기서부터는 만나기가 조금 힘들다. 숙소 예약 역시 조금 어려워 진다. 백키로 이내에 목표지점인 산티아고가 다가왔다는 게 체감된다. 나는 두가지를 생각했다. 순례를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 구간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끝이 가까워오니 정강이 통증도 사라졌다. 통증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건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다. 엊그제 비센테가 기다린다고 전화가 왔기도 하고, 나 역시도 머물만한 기막힌 숙소가 있지 않은 이상 빠르게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래야 마라톤 준비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정강이를 시험할겸 크게 걷는 날을 하루 만들었다. 그래서 47키로를 걸었고 비센테를 따라잡았다.


저녁 7시에 숙소에 도착했다. 나를 위해 짧게 걸었던 비센테가 포옹으로 나를 맞아줬다. 우리는 약 일주일만에 만났지만 순례길에서는 며칠만으로도 꽤 긴 시간이 된다. 헤이 어땠어. 다리는 어떻고.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지. 나는 씻지도 않고 비센테와 자리에 앉아 스테이크를 하나 시켰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와인한병을 다 마셨고 난 빅데이를 기념해 소주 반잔 만큼만 뺏어 먹었다.


”마지막 밤이야“

”믿기지 않는군“


우리는 그런 대화를 했다. 비센테와 나는 첫날 생장에서 같은 숙소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캘리포니아 영어로 수다를 떨던 그와 이렇게 오랜시간을 같이 보낼거라고, 심지어 마지막 날을 같이 기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그답게 나와 떨어져있는 동안 다시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패트리샤, 릴리, 안젤라를 만났어. 그들이 내일 우리를 기다릴거야. 아 그리고 테리도. 비센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나와 비센테를 기다리는 내일을 생각했다. 아무렴 기쁜 일이었다.



< 10/18 금, 산티아고 도착 한 날.

빈센테와 함께 걸었다. 5키로 남기고 테리와 합쳤다. 안젤라, 릴리, 패트리샤라는 친구도 합쳤다. 한켠에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더 큰 한켠에선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마지막을 기념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과 꼼포스텔라 성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더 이상은 피곤해 적을 수가 없다. 내일은 클로이와 앨런을 보러간다>


<10/19 토, 앨런, 클로이를 다시 만난 날

젠장, 모기인지 베드버그인지 온몸에 스무방 정도 물렸다. 한숨도 못잠듯한 상태로 피스테라로 출발. 한입에 전부 들어가는 4유로 짜리 오믈렛을 먹고 기분이 나빠졌지만 금세 신났다. 앨런, 클로이를

재회했기 때문. 신나서 방방뛰는 클로이. 땅끝으로 같이 걸으며 잡담과 수다. 오랜만에 영어에 대한 고민. 두통, 가려움, 복통, 설사. 몸에 아무래도 작은 바이러스가 침입한 듯 하지만 상관없는 날 >



그렇게 산티아고에서 여섯밤을 보냈다. 순례길을

마치고 산티아고에 머무는 시간은 중독적이다. 지난 한달간 아는 얼굴이 된 사람들과 걸음마다, 블럭마다 마주치기 때문이다. 둘째날은 맘놓고 걸어다닐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카페에서 오분정도 대화를 한 사람부터, 식사를 같이했던 사람, 하루이틀을 같이 보낸사람까지. 앨런, 클로이, 비센테, 테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지도 않았지만 마치 당신을 꼭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매우 보고싶었던 사람처럼 포옹하고 인사한다. 당신을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미셀, 미건, 캐롤린, 베티나, 제이비, 케이트, 사라, 루이, 수미, 샘, 애런, 세진 그리고 이름도 모르고 포옹을 주고받은 십수명의 사람들. 다들 꼭 ‘보고싶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고 선물을 받은 듯 반드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 까미노 매직이 일어난다던 지난 한달은 여기서 정점에 이른다. 나는 이 며칠을 위해 지난 한달을 걸어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마주침이 좋아서 산티아고에 가만히 오래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에 아는 얼굴이 줄어든다. 다들 각자의 다음 행선지로 발을 옮긴다. 피스테라나 묵시아로 순례길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고, 시내에서 멀쩡한 옷을 사입고 깜짝 변신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바버샵에가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내 다음 행선지는 포르투 마라톤이다.


산티아고에서는 몸을 풀었다. 순례길이 끝난 헛헛함을 흘려보낼 시간이 필요했다. 순례자 마인드를 마라토너 마인드로 바꾸고자 시도했다. 월요일에 6키로, 화요일에 10키로, 수요일에 13키로, 목요일에 12키로를 뛰었다. 산티아고 올드타운을 한바퀴 달리고 돌아오면 배낭을 맨 순례객들이 성당앞으로 여전히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울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점프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느 밤엔 거리의 악단이 순례자들과 함께 커다란 공연을 열기도 했다.


“난 이제 포르투로 가야해”

내가 샘에게 말했다.


“뛰어갈 거예요?“ 그녀가 말한다.


나는 그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버스를 타고 갈거야” 내가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나는 숙소에 들어와서 포르투까지 뛰어가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봤다. 20키로씩 뛰면 열흘 정도 걸릴 거리였다.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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