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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오빠. 05화

오빠.

23년의 재승 오빠.

by 남이사장

이십삼 년 정도가 지났다.

기억이 흐릿할 만도 한데 재승이 오빠와의 기억은 전화 한 통으로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그동안 접어두었다가 한 번에 펼쳐버린 오빠의 기억은 유쾌하고 뚜렷하고 깊었다.

마지막이라고 인지한 것도 없었다.

그냥 내일 다시 볼 사람처럼 "잘 가요"라고 한 기억이 전부 인 채로

마지막 인상이 깊은 오빠는

내가 졸업을 앞두고 오빠는 대학원을 진학하느냐 마느냐로 고민 중이었다.

내가 십여 년간 (몇 년인지 기억이 희미한 굉장히 많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좋아했던 오빠가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방에서 완전히 고립생활 중이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 안에 혼자.

고립을 결심하고 난 집 안 청소를 정말 미친 듯이 하고 욕실청소까지 마친 후에 새벽 두 시쯤

갑자기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았고 '너 울만해 울어'라고 나 스스로에게 위로?를 했었다.

깨끗한 집에 덩그랗게 남아 있는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무척 비극적이라고 생각을 했겠지. 기집애.

새벽에 잠깐 그렁그렁하다가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몸을 담갔다가 배가 고팠었는데

시나몬 토스트를 그릇에 부어서 탐욕스럽게 먹었다. 커피를 내려서 마시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침대에 누웠고 다시 울다가 해가 뜰 무렵 다시 잠들었다.

그 후로 일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낮에 일어나서 씻고 뭔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울고 자고 울고...

그 암흑기에는 책도 읽지 않았고 tv도 틀지 않았고 라디오조차도 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추어도 내 머릿속이 시끌시끌하고 어려웠다.

그렇게 보내던 중, 친구며 가족들이며 전화도 모두 받지도 않고 텅 빈 answering machine 만 열심히 돌아가고 그 내용을 듣고 사람들을 알았다.

그런 생활 중에 난데없이 재승이가 후배 녀석들이랑 나를 찾았다.

오빠는 우리 집에 들어온 적도 없어서 나도 적잖이 놀랐었다.

코트를 입고 걸어 들어오면서 손에는 딸기를 6박스 들고 들어와서는

냉장고에 넣으면서 "냉장고 청소했네. 뭘 먹은 흔적이 없게 여기다 넣는다 이 딸기 농약 안친 유기농

딸기다. 미국 딸기 맛없다고 안 먹는데 이걸 안 먹어 본 사람들 말이야. 농약 안 쳤으니까 이거 그냥 먹어도 안 죽어 알아 들었지 "라고 말했었다,

그날 저녁에 혼자 앉아서 딸기를 씻어 입에 넣었는데 지금도 그 딸기향이 기억날 정도로 맛있었고 또 얼마나 탐스럽게 생겼는지 딸기만 기억이 난다.

오빠는 굳이 내 집에서 후배 들과 피자를 시켜서 실컷 먹고는 청소거리만 남겨두고

" 어떻게 그 한 사람을 그렇게 좋아해 눈도 두 개인데 미련하게 답도 없다. 미련한 네 탓이고 누굴 탓할 것도 없고 쯧쯧 꼭 불은 만두같이 그게 뭐냐?"

하필이면 그날 입은 잠옷은 흰색의 수면 잠옷이었고 내가 봐도 내 형상이 심하긴 했었다.

불은 만두라는 오빠의 평에 난 웃어 버렸고 나가서 공원을 걷자는 오빠에게 겨우 끌려나가 조지워싱턴아래를 걸었다. 강바람은 시원했고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었고 오빠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닫았었다.

한 시간 정도 걷다가 오빠는 돌아갔다.

맨 마지막 장면인가 다음에 한두 번 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어설픈 마지막 장면이다.

내가 첫사랑 아픔에서 깨어나 나는 미국 회사에서 인턴사원 지원을 했고

정신없이 여기저기에서 차이고 밀리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졌고

내가 한국을 돌아오고 하면서 23년이 지났다.

오빠는 그 당시에 대학원 진학대신 오빠의 집에 재산다툼이 일어났고 서울로 돌아와서 일을 정리하고 미국 이민을 결정하고 건아 언니와 결혼을 하고 꽤 부드럽고 달콤한 신혼 생활을 했으며

아들을 낳고 오빠 사업이 커졌고 텍사스에서 공장을 세워서 경영하면서 지냈다.

오 년 정도는 정말 꿈같은 생활을 하다가 딸을 낳았는데 오빠네 공장에서 사고로 딸이 세 살을 넘기지도 못하고 별이 되고 건아 언니와의 일 년 동안의 갈등을 겪다가 언니가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오빠도 "그래 그러자" 해서 언니는 서울에서 아들과 생활을 했고 오빠는 미국에서 혼자 일하는 생활을 삼 년 했다고 했다 정말 지옥 같았어. 두 번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할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삼 년 후 딸 기일날 오빠가 서울에 나와서 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하니 언니가 삼초도 안 지났는데 " 미국에 가자"라고 해서 여태까지 잘 지낸다고 한다.

오빠의 아들은 미국 육군 장교가 되는 과정에 있고 사업도 잘 되고 건아언니도 잘 있다고 말하는 오빠의 음성에서 힘이 들었던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가 오빠의 아들이 육군 장교 지원을 하는데 추천서가 필요해서 성준이에게 부탁을 했는데

성준이가 " 내 거면 되겠냐?"

라는 말에 - 성준이 것도 넘치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그냥 대뜸 " 내 아들이 동사무소 가는 건 줄 아니 너 윗사람 거! 알아들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그러더니 일주일 뒤에 정말 받아서 "이거면 되냐?"라는 메모와 받았다고 "내가 그 새끼 때문에 너무 말도 안 되게 높은 양반 추천서를 받아줘서 난 떨어질 줄 알았어"

하면서 웃는다.

오빠의 협박에 그 곧이 곧대로의 성준이가 추천서를 부탁한 것도 오빠가 슬쩍? 찔러봤다는 것을

전화기 통해 전해 듣는 나도 우리 셋다 웃겼던 이야기였다.


23년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실이라는 컴컴한 벽 앞에서 서있었다.

오빠와 나란히 걸었던 조지 워싱턴 다리 밑의 허드슨 강 공원길에는

늦은 가을바람이 불었고 은행잎이 시간을 떨구고

사랑하는 이들이 가족과 연인과 함께 시간 속에 있었다.

그날 나의 복장은 수면바지 위에 커다란 점퍼를 걸치고 진 회색 코트를 걸친 오빠와

말없이 걸었다.

오빠도 나도 아무 말 못 하고 왜 그리 서서 바라보았을까

아름다운 공원에 아름다운 사람들을... 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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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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