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 장애와 함께 살아가기
아프리카의 이 속담을 좋아한다.
"음악이 바뀌면 춤도 바뀌어야 한다(When the music change, So does the dance)"
예전과는 삶의 운영방식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새로운 음악에 새로운 춤을 출 때가 온 것이다. 바뀐 박자에 발이 꼬여 많이 넘어졌지만 지금은 한결 익숙해짐을 느낀다. 여전히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지만 예전보다 그 진폭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생활에도 조금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동안 내가 변화한 점들을 적어보았다.
- 억지로 웃지 않는다.
- 힘들면 쉰다. 카페인, 자양강장제, 링거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 하기 싫은 일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 내 욕구를 우선시한다(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는다.
- 우선순위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
- 기분 나쁜 말을 들었을 때 이야기한다. 이야기하기 힘들면 웃지라도 않는다(예전에는 기분 나빠도 상황이 어색해질까 봐 웃었다).
- 친절하되 남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 멍 때리는 시간을 즐긴다.
- 잠자기 전에 내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 내가 필요한 것에 적극 투자한다.
- 외롭다고 매번 타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일단 시작한다. 완벽하게 되지 않아도 힘들거나 시간이 지나면 마무리한다.
적고 보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들인데 나에게는 큰 고통을 겪고 나서야 변화가 가능했던 부분들이었다.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1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호전될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와 주변의 도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내가 우울증과 경조증일 때 도움이 되었던 행동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우울증일 때 >
1. 작은 목표 세우고 실천하기
목표는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우울증일 때는 씻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 거창한 목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주 작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면서 생활에 규칙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세운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하루 5분 산책하기, 자기 전에 씻기, 한 줄 일기 쓰기.
2. 그냥 무조건 나가보기
우울증에는 산책이 좋다는 말은 정말 많이 들었다. 밖에 나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씻어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친구가 잠옷에 패딩만 입고 어디라도 나가보라고 조언해줬다. 그 뒤로 잠옷에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를 걸치고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면 새로운 환경에 자극을 받게 되고 몸이 움직이니까 활력이 생겼다. 그 활력으로 집에 와서 씻고 생활했다.
3. 취소하지 않고 계획했던 대로 해보기
우울증이 오면 다 귀찮아 지기 때문에 경조증 시기에 잡아두었던 일정을 많이 취소했었다. 그럴수록 자괴감은 커졌고 집에서 나가지 않게 되므로 우울증이 깊어졌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지는 않더라도 기존의 것을 취소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좋은 상태가 아니더라도 일정대로 밖에 나갔다. 예쁜 옷을 입지 않고라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다는 성취감이 들고 밖에 나감으로써 주변 환기가 가능해져서 도움이 되었다.
4. 우울을 받아들이기
우울한 감정을 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우울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지나가는 감정일 뿐인데 느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그냥 우울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울을 없애기 위해 신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우울이 다시 왔다고 좌절하지도 않고 그냥 왔다가 다시 떠나가는 손님처럼 생각했다.
그랬더니 조금은 더 우울을 받아들이기 쉬워졌다.
5. '-해야 한다'는 생각 버리기
나는 이상향에 대한 그림이 구체적이고 확실한 편이었다. 그 그림을 늘 생각하고 구체화하면서 그림을 현실로 만드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해야 한다.'는 MUST가 많았다. 비싼 돈을 주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으면 10만큼 즐거워야 하는데 우울증의 시기에는 3-5 정도만 즐거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이제는 10만큼 즐거울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좌절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나 이래야 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법. 상황에 따라서는 1만큼만 즐거울 수도 있는 거고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10만큼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 이럴 것이라는 내 생각을 수정하려고 노력했다.
< 경조증일 때 >
1. 행동화하지 않기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것은 경조증의 증상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머릿속으로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잠도 잘 못 자기 때문에 쉽게 지쳐서 결국 우울증일 때보다 일을 더 못할 때가 많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벌려둔 일들 때문에 더 빨리 지치고 마무리 못했다는 자괴감에 우울증으로 빠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도 바로 행동화하지 않고 그 마음을 살폈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일부터 시작했다. 순간순간 하고 싶은 것들이 팝업창처럼 떠올랐기 때문에 행동화하지 않으니 금세 또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2. 명상하기
몸의 통증 완화와 이완에 명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바디스캔을 하면서 통증을 관찰하고 이완하면서 잠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잠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명상을 통해 이완하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떠오르는 수많은 욕구들을 관찰하는 것과 호흡을 천천히 하는 것에도 명상이 도움이 되었다.
3. 의식적으로 천천히 하기
경조증일 때는 레이싱카에 탄 기분이 든다. 생각도 빠르고 행동도 빨라진다. 그러면서 과부하가 걸리고 지치게 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천천히 하는 것을 연습했다. 걸음도 천천히 걷고 먹는 것도 천천히, 말도 천천히, 숨도 천천히 쉬었다. 그 공백으로 과부하를 막을 수 있었다.
4. 수면제의 도움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아도 수면제는 먹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약에 의존해서 자기 시작하면 나중에 단약하기 힘들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잠과 싸우려 했다니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잠을 자는 것은 신경을 안정시키는데 매우 중요하고 그게 안되면 억지로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게 나에게는 더 좋았다. 수면제가 있어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