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 뒤로 공장들이 쭉 들어서 있는데 그중 한 구역만 텅 비어있다. 그 공터는 가득 찬 것들 속에서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 공터를 보았을 때 '왜 저렇게 땅을 놀리고 있을까, 뭐라도 지어서 하는 게 훨씬 돈이 될 텐데'라고 생각했다. 2년 동안 산책길에 그 공터를 지나다니면서 처음의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공터가 보여주는 계절의 변화는 참 아름다웠다. 봄에는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너도 나도 움터 올라 회색 건물들 사이에서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고 여름에는 그 초록빛이 더 짙어져 시원한 그늘처럼 느껴졌다. 그중 가을의 풍경이 압권인데 억새들이 바람에 출렁거리며 춤출 때 내 가슴도 함께 일렁거렸다. 겨울에는 새하얀 눈으로 덮인 채 그 누구의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고 하얀빛을 유지하며 고고하게 빛났다. 해 질 녘 마른 잔디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만드는 풍경도 멋있다.
아마 공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면 그런 아름다운 풍경들은 없었을 것이다. 공터를 보면서 비어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시간이든 생각이든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편이었다. 5분이라도 시간이 빌 것 같으면 책을 챙겨 나갔고 하루에 일정을 4개씩 소화하곤 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운전 중에 영어 라디오를 들으며 명상호흡을 연습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다음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유용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했다.
쓸모 있음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수록 내 존재 그대로의 가치는 점점 잊혔다. 칭찬받거나 성취하지 않으면 내가 쓸모없는 존재 같았다. 지치고 힘들어도 쉴 줄 몰랐고 바쁘게 나를 몰아치면서 불안을 잠재웠다. 그러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예전의 방식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고서야 뭔가 잘 못 해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상담에서 공간(room)을 중요시하는데 내담자의 감정을 품어주고 표현하게 해주는 심리적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을 말한다. 현재 내담자에게 없는 공간을 상담자가 대신 제공해주는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작은 일에도 화가 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겐 언제나 빈 공간이 필요하다. 예쁜 소품도 공간이 복잡하면 눈에 띄지 않지만 공간이 여유로울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어있는 공간도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무용에서도 유용함을 찾으려는 나의 이 몹쓸 습성이란..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몸소 경험하고 나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고 여유 있는 시간을 그대로 둔다. 마음의 욕심도 하나씩 내려놓고 있다. 먼 미래의 일을 욕심내기보다 현재의 순간을 충실하게 살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도 하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을 들이고 있다. 여전히 욕심껏 손에 가득 쥐려고 할 때가 있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