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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11. 2020

민중가요의 록발라드, ‘천지인’의 “청계천 8가”

민중가요 이야기 #16

악기에게 이데올로기가 있을까? 적어도 내가 군대에 가기 전인 1990년까지는 악기에도 이데올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 한국어 사전에서 찾아 본 "이데올로기"

전에 “전노협 진군가” 편에 썼듯이 선배들은 드럼을 연주할 때 대중가요 같다며 Hi-hat을 못 치게 했다. 기타는 통기타만 가능했으며 디스토션을 건 Elec Guitar를 사용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노래모임 ‘새벽’이 공연에서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그 주제로 대담이 열리기도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다음은 유인혁이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석희’의 글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가요의 편곡 관행을 받아들이며 드럼과 베이스 기타를 도입하여 밴드 형태의 반주팀을 꾸린 것 역시 노래패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다. 하물며 록 밴드라면 말해 무엇하랴. 80년대 내내 록 음악을 비롯한 대중음악은 ‘지배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업적이고 향락적인 대중문화’로 간주되었고 ‘우리 것’을 추구하던 대학 문화의 담당자들에겐 극복해야 할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안석희, "민중가요의 관습을 깬 록 밴드 천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kdemo.or.kr/blog/culture/post/42)

난 재수를 했다. 위에 형 둘이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갔고, 덕분에 나도 재수까지는 허용이 되었다. 큰형이 고3 때 아버지는 큰형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큰아들이니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재수는 절대 안 된다." 큰형은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다. 작은형이 고3 때 아버지는 작은형에게 말씀하셨다. "형은 재수를 했지만, 너까지 재수를 시킬 수는 없다." 작은형도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다.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큰형, 작은형 둘 다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는데, 너는 진짜 안된다." 죄송스럽게 나도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다. ㅠㅠ


난 사실 고등학교 성적이 좋지 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건 재수를 진짜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4당5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는 말 때문에 재수를 하는 동안 평균 4시간 정도 잔 것 같다. 난 단과학원을 다녔는데, 공강 시간엔 근처 도서관에서 10시간을 꼬박 앉아서 공부만 했다.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하던 농구를 재수를 하며 10번밖에 하지 않았고, 기타를 치지 않기 위해 왼손에 박혀 있는 굳은 살을 면도칼로 도려내기도 했었다.

 

내가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대학을 꼭 가야 하는 세 가지 절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는 그 당시 캠퍼스 드라마에 나오는 "잔디밭에서 여자친구 다리 베고 누워 책 보기"를 꼭 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대학가요제에 나가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가요제라는 건 말도 안 되는 특권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학생만 나갈 수 있다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대학 입학 후 들어가기 어렵기로 소문난 대학 연합 동아리 '상투스' 오디션을 한 번에 통과했고, 꿈에 그리던 대학 밴드에도 들어갔다. 밴드의 이름은 성균관 대학교답게 "정4품"이었다.

 

그런데 내가 꿈꿔왔던 대학생활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잔디밭은 늘 최루탄 냄새로 매캐했고, 나에게 다리를 내어줄 여자친구도 없었다. 과방에서 고등학교 때 갈고닦았던 기타 치며 팝송 부르기를 시전 하려고 하면 선배들과 심지어 동기들까지도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방에서 만나는 선배들은 모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고애신” 같았다. 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동안 꿈꿔왔던 드라마 속 대학생활을 계속 쫓을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존재하는 대학 생활을 받아들여야 할지... 이러저러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1학기를 마치고, 난 가장 좋아하는 선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조국을 위해 쓰고 싶어요.


팝송과 록을 하며 단련한 목소리를 민중가요에 맞게 바꾸기 위해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는 목소리가 아닌 체력과 호흡에만 나쁜 영향을 미쳤다. 노래를 못하니 본의 아니게 기타 반주에 집중하게 되었고, 1989년 서대노협에서 주관으로 열렸던 노래학교 기타 테스트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1989년 과 노래패 “꼴굿떼”를 결성했고, 1990년에는 과노래패를 모아 성대노래패협의회 구성을 주도하여 의장을 맡기도 했다. 민중가요는 사실 내게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시시해 보였다. 하지만 선배들 눈치에 그 어떤 음악적 시도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대를 하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아마 전에도 언급했듯 군사독재의 종말이 문화에 미친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93년 민중가요 록 그룹 ‘천지인’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이 나왔다. 물론 불법으로...

 

오늘 소개하는 ‘천지인’의 노래 “청계천 8가”는 ‘천지인’의 1집에 실렸던 노래다. 1997년 발매된 천지인의 ‘이집(離集)’에도 편곡을 달리해 수록되어 있다.

민중가요 록발라드 명곡, ‘천지인’의 “청계천 8가” 악보

과거 민중가요의 전문성은 밖에 있는 대중을 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모든 전문성은 언젠가부터 전문성의 밖을 향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교사는 교육전문가의 밥그릇을 위태하게 만들 뿐이다. 국민의 곁을 지키는 정치인일수록 경쟁자로 구성된 당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과거 악기에게까지 이데올로기를 부여했던 민중가요의 전문성은 도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했을까?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문제도 있다.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오히려 금지를 통해 더 큰 힘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은 효심이 만든 국정교과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착각하지 말자, 이제 세상은 정(正)에 반(反)하면 합(合)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의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강한 반(反)은 정(正)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며, 정(正)에 대한 지나침이 반(反)을 키우는 “역설의 시대”다.

 

난 광화문 촛불혁명은 주장의 결과가 아닌 주장의 포기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탄핵을 위해 평균 100만의 시민이 매주 광화문에 운집한 촛불집회에서 각자가 자신이 처한 절박함을 담아 여성주의와 노동해방과 조국통일을 외쳤다면 “촛불혁명”이 아닌 “촛불분열”로 끝났을 것이다.


필자가 민중가요 이야기를 한다고 해 놓고 이렇게 개똥철학만 늘어놓는 이유는 사실 “청계천 8”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 외에 노래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래에 대한 호불호는 필자가 아니라 대중이 판단하는 것이다. 자, 이제 또 선택의 시간이다. 필자가 부른 “청계천 8가”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유튜브에서 ‘천지인’이 부른 “청계천 8가”를 찾아 들을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2월 1일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박시환’이 부르는 “청계천 8가”를 직접 보고 들을 것인가!

필자가 부른 "청계천 8가" 늘 부끄러움은 필자의 몫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x_K2MK9lvw

샤방샤방 박시환이 부를 "청계천 8가"

잘 몰랐는데 민중가요 소환 콘서트 “the 청춘”에 대해서도 다양한 호불호가 생산되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취향을 가치화시키는 근대주의의 망령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평균의 종말"의 저자 '토드 로즈'가 말했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고... 2020년 이 시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일까, 현실 그 자체일까, 아니면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미래일까? 공식 하나로 글을 마무리 하겠다.


취향 + 가치 =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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