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6
성대 철학과 89학번 중에 허우대 멀쩡한 후배가 하나 있다. 그 후배는 언제, 어디서건 노래를 하기 전, “노래란”으로 시작하는 멋들어진 멘트를 읊은 후 노래를 불렀다. 대학 졸업 후 한참을 잊고 있다가 민중가요에 대해 글을 쓰던 중 갑자기 그 후배가 떠올라 근 20여 년 만에 뜬금없이 전화를 했다.
OO야, 잘 지내지?
응, 나도 뭐 잘 지내지~
너 대학 때 노래 부르기 전에 했던 그... 노래란, 어쩌구 하는 거 있지? 그것 좀 기억나는 대로 문자로 좀 보내주라.
다음은 후배에게 문자로 받은 내용이다. 읽다 보니 그 시절과 그 후배의 모습이 생생하게 겹쳐진다. 세상에 아직까지 그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다니...
노래란,
근로인민대중의 노동생활 속에서
감성적으로 인식된 미적 관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파성에 입각하여
음의 고저장단을 무시하고
악을 동반하여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에네르기를 모아
목구멍의 혁명적 진동을 수렴하고
입을 통하여 투쟁적으로 발산한다고 할 때...
다소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노래라는 예술 형식을 철학적으로 꽤나 잘 묘사했다. ‘노래’라는 행위의 시작은 인간의 노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래의 어원은 ‘놀다’이다. 애초에 노래라는 행위가 시작될 무렵의 인류의 삶에 놀 여유라는 게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는 게 노는 게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노는 게 노는 게 아니야~
마치 쉼과 재충전이라는 의미의 영단어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의 어원이 재창조(re creation)인 것처럼 노는 행위는 더 빡씬 노동을 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었고, 노래는 고단하고 힘겨운 노동을 이기기 위한 추임새가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래 앞에 붙은 민중이라는 수식어는 요즘 기업 앞에 붙이는 ‘사회적’이나, 만화 앞에 굳이 붙이는 ‘학습’처럼 부자연스럽다. 사회적이지 않은 기업이 어디 있으며, 편견을 걷어내면 또 학습적이지 않은 만화가 어디 있겠는가! 노래 또한 그 자체가 민중적인 것인데, 노래라는 녀석이 자꾸 민중을 떠나 존재하는 것처럼 행세를 하니 강제로 민중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놓은 것이다. 가요는 다 민중가요다. 그러므로 민중의 삶과 무관한 노래에만 ‘대중(을 혹세무민 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어거지일까?
민중가요의 황금기는 87년 6•10 항쟁으로 인해 촉발된 대중운동의 확산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그렇게 다양한 민중가요가 필요 없었다. 민중가요를 소리 높여 부를 상황 자체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골목 깊숙한 술집이나, 칙칙한 지하 골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몇 곡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김민기는 “아침이슬”이나 “친구”, “작은 연못”, “금관의 예수” 등 현실을 문학적으로 에둘러 표현해 가락 위에 얹었다. 6•10 항쟁 이후에는 수면 아래에 잠자고 있던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중들을 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선동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마치 로마 제국이 미개한 게르만 민족을 포교하기 위해 기독교를 상징할 수 있는 실체인 십자가와 성모상이 필요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난 음악 평론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평론이라는 행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아니 일반적으로 평론가는 예술과 대중 사이에서 그 둘을 격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내가 좋으면 그만인데, 자꾸 평론가의 눈치를 살피게 만든다. 암튼 민중가요의 황금기를 이끈 김호철과 윤민석에 대해 반반(半反)전문성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다.
김호철과 윤민석을 민중가요의 양대 산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두 거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매우 극명하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비슷한 시기에 민중가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것이고, 어마어마한 창작활동을 통해 매 시기마다 필요한 노래를 생산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호철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88곡을 작사했고, 114곡을 작곡했다. 윤민석은 지금도 세월호, 촛불집회 등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새로운 노래를 발표해 주고 있다. 차이점은 각각 노동자와 학생, PD와 NL을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노래로 들어가 보면 차이점은 더 극명해진다. 같은 투쟁가라도 윤민석의 노래는 가슴을 울리지만, 김호철의 노래는 배에 힘을 빡 주고 불러야 한다. 김호철을 상징하는 악기가 트럼펫이라면 윤민석의 음악은 마치 감정이 풍부한 현악기의 울림을 듣는 듯하다. 김호철의 노래 가사가 망치, 총파업, 노동 해방 등 노동의 현장에서 막 끄집어낸 단어들로 노동자의 구체적인 투쟁을 독려한다면, 윤민석의 노래 가사는 자주, 민주, 통일, 민족, 애국 등의 가사 선택을 통해 노동자가 아닌 대학생들이 투쟁의 대오에 함께 해야 하는 시대적 당위를 일깨운다. 또 김호철의 노래는 시작부터 강력한 포르티시시모의 연속이라면, 윤민석의 노래는 잔잔하게 시작해 점점 고조된다.
김호철의 노래와 윤민석의 노래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거나, 어느 쪽이 더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비교는 무의미하다. 같은 민중가요지만 노래의 주제와 대상이 달랐고, 각각 그 대상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적화된 노래를 생산해 냈기 때문이다. 나 같은 허접한 사람은 대중의 요구와 무관하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일방적으로 부르고, 내가 만들 수 있는 노래만 겨우 만들 수 있다면, 두 거장은 철저하게 대상에, 시대에 최적화된 창작물을 뽑아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민중가요계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시대의 변혁을 꿈 꾸며 살아온 이라면 모두 김호철과 윤민석에게 큰 빚을 지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부터 두 분 모두 다 옆지기의 건강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다음은 페이스북에 개설된 김호철, 윤민석 후원 페이지다. 나처럼 그들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면 링크를 한번 따라가 보기 바란다. (http://bitly.kr/rPjPm0T)
올해는 김호철이 파업가를 작곡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국문과 노래패 “꼴굿때를 만든 지도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노래패 "꽃다지"의 정윤경 감독이 김호철 헌정 음반을 제작하여 판매 중이라고 하니 작곡가 김호철에게 나처럼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은 구입해 보길 권한다. 나도 늦게나마 몇 개 주문을 넣었다. 김호철 헌정 음반은 '노동의 소리' 누리집(http://nodong.com)에서 구입할 수 있다. (@Back2An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