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데요?” 밥상머리에 얼른 나타나지 않고 욕실에 틀어박혀 있는 내게 던지는 아내의 날 선 일갈, 거울 앞에 그처럼 오래 머무르는 일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나르시스처럼 제 얼굴에 넋을 빼는 것은 고사하고 피부나 머리 매무새에 신경이라도 좀 써 주면 오죽 좋으련만 그런 것과는 사뭇 거리가 먼 사람이니 아내의 채근에도 일리는 있다. 다만, 상황을 더 지속해 보려는 나의 대답이 애절하다. “잠깐만~”
하물며 내가 거울 앞에서 정신을 놓을 때가 있음을 아내는 더더욱 모른다. 그 비밀의 시간이란 치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몽상에 가까운 것이다. 얼굴의 색이나 윤곽을 살피기는커녕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쓰다듬으며 모종의 환상에 빠져 북국의 들판과 같은 순백의 세계를 홀로 자박자박 거니는 것이다.
상상은 날개를 단 것이어서 때론 어느 이름난 장면에 등장하는 노회한 인사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박제된 표범과 라이플을 배경으로 앉은 헤밍웨이의 건강한 인상 같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적 조밀함이 올올이 박혔음 직한 아인슈타인 박사나 슈바이처 박사의 풍성한 흰 머리라든지 혹은 ‘우주 소년 아톰’에 나오는 박사의 영민해 보이는 인상 같은 것이다.
혹은 TV 강좌에 나온 어느 인문학자의 하얀색 상고머리에서 본 강렬함을 생각한다든지, 영화 ‘은교’를 보면서 배우 박해일의 백발에 그의 캐릭터보다 더 열중한 기억, 혹은 마지막 콘서트를 여는 가수 ‘페티김’의 짧은 은발이 던진 자신감과 영화배우 신성일의 삶에서 훔쳐본 굵은 웨이브와 연한 회색 수염의 조화 같은 것이라 할까. 어쩌면 그것들은 그들의 삶보다도 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그러한 인상들은 바라보는 대상으로의 푸근함을 넘어 닮고 싶은 의지로 화하기도 한다. “희어져라. 풍성하게 희어져라. 나의 머리카락아!” 어느새 열망은 오륙 년 후의 내 모습을 거울 너머에 그려놓기도 한다.
목에 두른 머플러도 머리카락도 명도 7 정도 밝기의 엷은 회색이다. 적당한 크기의 뿔테 안경을 걸친 느긋한 나. 하이든의 실내악 2악장에 맞추어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나는 사람들을 향하여 입을 연다. “참 좋은 아침입니다.” 때마침 창으로부터 불어온 엷은 바람이 내 회색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건드리며 커피 향기 저편으로 사라진다. 모두가 아다지오의 속도다.
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다니. 나의 은빛 몽상은 아무래도 이상한 열망이다. 마치 황혼의 장엄을 보기 위하여 해가 빨리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면 말이 될까? 시간에 대한 보편적 아쉬움의 반대편에 선다는 것은 지독한 패러독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월의 아쉬움을 감추려는 위장이거나. 아무튼.
은발로 나아가려는 나의 태도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사람들은 나의 느긋함을 두발의 백화 방치를 자칫 외모에 노력을 투자하지 않으려는 천성적 둔함이거나 게으름의 소산으로 인정하려 한다. 예를 들어, 내 머리를 염색해 주려는 선의를 불편해하는 나의 태도에 아내는 늘 어리둥절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카락들의 전투에서 흰색의 위세가 검은 것들을 압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명도 7 정도의 은발이 나의 열망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가끔 거울 앞에서 헤벌쭉 웃는 내 모습을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저 아이러니로 넘겨주시길 바랄 수밖에.
거울 너머의 저편에 이런저런 환상을 그린 지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이다. “거울아, 거울아.” 그러고 보니 내는 매일 거울 앞에서 시간에 관한 질문을 반복하며 살았다. 내 거울 속의 환상 또한 나의 열망에 맞추어 시간의 순행과 역행을 반복해 주었다.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순간만 해도 그렇다. 상고머리, 빡빡머리 시대를 지나면서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고, 휴일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으며 다정한 남편과 자상한 아버지를 꿈꾸었다. 그뿐일까? 나이 들어서 염색할 때에는 에너지 넘치는 삶의 의지를 다졌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면서는 인생의 유한함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거울 속의 시간은 늘 내 편에 서 있었다. 삶의 의지란 시간의 되돌림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여겼다. “검어져라. 검어져라.”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의 추는 나를 안도케 하였다.
그러던 내가 거울을 통하여 시간의 흐름을 순순히 인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열망과 현실 사이에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시간의 추가 느린 궤적을 그리고 있었으니 놀라움이었다. 맑은 거울과 염색약을 손에 쥔 나 사이에서 모종의 성애가 막 사라지려던 그때, 나는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고 있었으며 그 수긍의 순간은 짧고 단호했다. ‘순응’이라 불리는 그것은 우주와 자연과 섭리를 움직이는 크고 긴 것이었다.
이후로 인생의 한 70% 정도의 지점에 머물게 해 달라는 새로운 열망을 거울 앞에 늘어놓았던 것은 아닐까? 그 정도에서 절충해야 함은 나의 한계이며 두려움이다. 종국에 가서는 다시 시간을 역행하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은발의 머리카락에도 한 30% 정도의 검은 머리가 섞였으면 한다. 색으로 치면 명도 7 정도의 라이트그레이, 나는 그런 단계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것이다.
진부하지만 공자의 관찰을 빌린다. 흑발의 정점이 약관(弱冠)의 20이라면 백발의 완성은 종심(從心)의 70 정도가 아닐까? 백과 흑이 70 대 30 정도의 비율이라면 짐짓 지천명(知天命)을 지난 이순(耳順) 정도이니 내 나이에 견주어 억울할 일도 없을 터이다. 시간에 대한 조급함이 사라졌으니, 몽상의 느긋함이라 해 두자.
나는 내일 아침에도 욕실의 거울 앞에서 서성일 것이다. 성애가 걷히고 거울 너머에서 회색 머플러를 걸친 7 대 3 은발의 사나이가 뚜벅뚜벅 걸어오면, 그이에게 물어보리라.
“여보시오. 나의 오래된 친구여! 그쪽에서 보니 편안해진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소? 그럭저럭 볼만한 풍경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