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민 May 28. 2022

물의 건축

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장_그르니에’의 책 한 권을 끼고 제주로 떠난 길은 물을 보러 가는 여정이었다. 비행기 창 밖은 경계가 없는 몽환적 풍경이었지만 분명 거대한 수면 위를 나르고 있을 터였다. 철학자는 ‘여행이란 일상적 생활 속에 졸고 있던 감정들을 일깨우는 활력소’라고 썼다. 사방이 물인 내 고향 부산에서 또 다른 물을 보러 간다는 행위에 나는 벌써 흥분하고 있었으니, 물의 동네에서 또 다른 물을 만나러 큰물을 건너고 있는 묘한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평생을 물의 동네에서 살았다. 육지의 끝은 어디에나 물이 있었고, 육지의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수십 분 내에 있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여러 번 물을 건너기도 하였다. 건축을 배운 이후로는 타지마할이라는 보석을 띄운 무굴제국의 물과 펜실베니아 어느 골짜기 프랭크로이드_라이트의 건축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궁금했으며, 그때마다 여름의 소쇄원과 겨울의 안압지를 찾곤 하였다.


제주에서는 두 장소의 물을 만나볼 참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였던 건축에 대한 생각처럼 확연하게 다른 두 속성의 물. 정적인 공간에 활력을 주면서 스스로 주제가 되려는 매우 적극적인 물과 자신을 버리고 배경으로 존재하려는 그저 소박한 물. 그러한 물이 두 거장의 건축과 함께 거기에 있으리라. 


안도_타다오(1941~)가 연출한 본태박물관의 물은 당돌하고 극적이다. 흐름과 낙차가 있으나 소리를 절제함으로써 낙수장이나 소쇄원의 물과 다른 고고함을 추구했다고 할까? 그렇다고 하여 결코 스스로 숨지 아니하고 활기에 찼다. 심지어 본태 격인 콘크리트 조형에 맞서 도발적이고 대담하기까지 하다. 지형의 변화를 자연스레 이어주는 데에 물만 한 것이 있었을까? 마치 경계를 버리고 번진 수채화의 한 폭처럼, 건축가는 딱딱한 물성의 콘크리트 사이에 물이라는 무형의 자유 물질을 끼워 넣음으로써 은폐된 기하학의 틈에 몽상을 끌어넣었다. 


아무튼 이 물은 결코 배경일 수 없다. 세련된 건축가의 재주로 길이와 높이를 지닌 물은 스스로 이미지가 되려 한다. 아마도 디자인의 시작이 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본태(本態)란 말의 훈에 물의 이미지를 겹쳐본다. 아~ 물은 인간의 근원. 


 반면 이타미_준(1937~2011)의 건축, 방주교회에서의 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다. 짐작한 대로 그저 물로 누워있을 뿐이다. 건축가가 교회 건물의 베이스로 물을 설정한 것은 타당하다. 방주(方舟)라는 이름의 종교적 유래와 그것에 대한 직설적 은유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교된 안도_타다오가 설계한 교회들의 예로 보아도 배경으로의 물의 이미지 차용은 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내가 안도_타다오의 물에서와 다른 느낌이 든 것은 스스로 형태를 만들지 않고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물의 희생적 속성에 있었다. 무척 종교적이었다 할까? 어쩌면 건축의 본질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아도 가치 있는 그런 대승적 존재감 말이다. 다시 말하여 그 속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 기능 앞에 기꺼이 배경이 됨으로써 건축이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사물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그 인간과 합일된 존재로만 고양될 그런 숭고함 말이다. 


물의 그러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일순간의 바람이었다. 그 잔잔한 파문에 이 훌륭한 창조물은 생명으로 빛났다. 건축이 비로소 박제된 사물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빛 또한 한몫하였다. 수평으로 누운 물 위에 앉은 수직의 빛, 둘이 만들어 낸 반사는 본연의 깊이에 상상의 깊이를 더한다. 때론 구름을 받아 묵직하게 드러눕고, 때론 하늘을 들여 파란 영원에 빠진다. 노건축가는 캔버스에 무형의 것들로 만들어 낼 유형의 풍경을 그렸던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장-그르니에를 읽는다. “이런 몽상은 그렇다고 하여 결코 씁쓸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물을 내게 특별하여, 물에 대한 열망은 내 건축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고, 때론 날개를 달기도 한다.  


이 도시에서만 하여도 나는 격이 있는 물의 부재가 늘 아쉬웠다. 예를 들어 일산 신도시와 해운대 신시가지의 차이점 같은 것이다. 이른바 일산 호수공원의 경우, 열악한 조건에도 시가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격을 높였다. 뉴욕의 센터럴파크처럼 허파 역할은 물론 도심의 핵으로 도시의 질을 이끈다. 반면 한켠에 배치된 해운대 대천공원의 호수는 늘 아쉽다.


그 외에 수영강변, 온천천변, 낙동천변 등이 정비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건축과 연관된 세련된 물의 차용은 미미하다. 하물며 바다라는 천혜의 물을 곁에 두고서도 다루는 실력은 여전히 역부족이다.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주거시설로 채워진 마린시티의 실패는 차치하고라도, 헤쳐진 북항의 현장을 보면서 이곳 또한 개별의 주거시설로 채워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땅의 효용이 아니라, 주변에 널려있는 물이라는 천혜의 요소를 격조 높게 누리지 못하는 무지가 그저 안타깝다. 그리하여 나는 물의 도시에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물에서 멀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몽상한다. 끝내 물을 곁에 두리라. 오호라! 세상의 절반은 물. 그런 물은 인간의 본태였으며, 방주를 띄운 바다였고, 도시인들이 의지할 최후의 보루이며, 가난한 건축가에겐 하나의 열망이 되기도 한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