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제한으로 탄생한 서울의 섬
지도상으로 보면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것 같지만, 동네를 걷다 보면 서울이라기보다는 시골 동네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남산 주위로 적용되는 고도제한이 있는 지역이어서 고층빌딩 숲 옆에 갑자기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지금 집을 건축하고 살고 있는 곳이다. 고도제한으로 사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재개발이 쉽지 않았고, 시간 여행을 떠난 것처럼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부터 오래된 주택들과 신축빌라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 미군이 떠나고 남은 부지(다시 돌아온다는 소문도 있다), 커다란 등처럼 묵묵하게 앉아있는 남산이 섞여서 도심에서 만나기 힘든 풍경을 만들어 냈다.
우리 집은 나름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있는데(?), 집의 아래 방향에서 걸어가다 보면 골목의 오래된 단독주택들과 그 옆의 신기하게 잘리듯 살아남은 작은 숲의 풍경이 보인다. 이 방향으로 걸어올 때 시골길 같은 이 풍경이 늘 마음에 묘한 위로를 준다.
남산공원 입구에서 집을 오려면 80개의 정도의 아주 긴 계단을 지나 내려와야 하는데, 여름에는 이 계단이 정글처럼 바뀌어서 탐험하듯 내려오는 재미가 있다. 계단의 옆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가 계단에 화분을 많이 놓고 정성으로 가꾸시는데,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서 계단을 지나려면 나뭇잎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할 정도이다. 한강에서 불꽃놀이 축제를 할 때면 계단에 앉아 불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계단은 지대가 높은데, 여름빛을 흠뻑 맞고 맹렬히 자라난 꽃들과 나뭇잎을 헤치며 내려올 때 만나는 서울의 도심 풍경은 비밀의 섬의 입구에 도착한 것 같다.
지인들에게 우리 동네를 <서울의 섬>이라고 종종 얘기하는데, 서울과 단절된 듯한 독특한 풍경 이외에도 다른 문화와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우리 집 테라스에서 보이는 말벌집을 119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 첫째가 우리 집에 멀지 않은 빌라 벽에 말벌집이 있다고 했다. 말벌집에 대해 무지했기에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놀러 온 지인에게 무심코 이야기를 꺼냈다가 말벌집이 맞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방서에 신고를 했다. 신고자가 신고 위치에 대해 나와있어야 된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담스럽게도 커다란 소방차 몇 대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출동했다. 말벌집 위치를 알려드렸더니 확인하시고 최근에 신고된 것 중에 가장 크다고 했다. 의외로 동네에서 말벌집이 자주 발견된다고 하시면서.
<서울의 섬>은 누군가에게는 단점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장점일 수도 있는 교육 문화도 있다. 커뮤니티가 잘 구성되어 있지 않고 학원가와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교육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성적이 어떠한지,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공유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아이들끼리의 관계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큰 단점이다) 사교육이 치열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초등학생인 첫째를 좋은 커리큘럼의 동네 예체능 학원에 보낼 수 있어 만족하지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는 지금은 학습에 대한 걱정이 있기도 하다.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는 초등교사인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방 어떤 곳 보다도 내가 교육열이 제일 낮은 것 같아서 말이다. <서울의 섬>에 나름 자유롭게 살던 아이가, 다른 동네로 이사 가서 갑자기 본인이 부진아처럼 느끼지 않을지, 교육열에 주눅 들지 않을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차로 라이딩을 20분 정도 해서 보내보려던 영어학원은 내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아이에게도 왠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이번에도 유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