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 밥 먹는 날을 기대하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모델 출연자가 식물에게 물을 주면서 했던 말이다. 직업의 특성상 식단을 혹독하게 관리하는 그녀의 진솔한 심경이 전해지는 장면이었다. 나 역시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체중 관리를 하고 있는 터라 그 말에 맹렬히 공감했다. 먹어 봤자 내가 아는 맛이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면 거기에 정신을 빼앗겨서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참는 데 한계에 도달했던 어느 날은 꿈속에서 그 음식을 쩝쩝대며 먹다가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이력서 맨 마지막 줄에 기록된 직장은 야근이 많았다. 월간지 편집팀의 평균 야근 일수가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인데 그곳은 최소 2주일이었다. 초반에 매체 창간 작업을 할 때는 3주 가까이 됐던 걸로 기억한다. 마감 기간의 퇴근 시간은 새벽 3~4시쯤이다. 저녁 식사를 보통 오후 7시쯤에 하기 때문에 밤 11시에서 12시 사이면 출출해진다. 그때 선배들과 치킨이나 족발 등 야식을 먹으면서 배를 채우는데 새벽 2시쯤 또 한 번, 허기가 찾아온다. 이미 한바탕 먹었기 때문에 ‘배고파 죽겠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입에 무언가를 넣고 싶다. 먹다 남은 차가운 야식은 싫다. 새벽 공기도 쐴 겸 편의점으로 향한다. 달달한 초콜릿, 쫄깃한 캐러멜, 부드러운 쿠키 등 간식을 종류별로 한 아름 사 와서 책상에 앉아 뜯어먹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잘 맞았던 치마가 너무 껴서 단추가 안 잠긴 것이다. 평소엔 적당히 먹고 있으니 마감 때 조금만 주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장 그달 마감부터 야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하지만 3일 차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이 떨어지니 인내심이 바닥나서 책상 앞에 버티고 있을 힘이 부족했다. 결국 참고 참다 편의점에 왔다. 초콜릿 하나만 골랐다. 그리고 열량은 낮지만 배는 부른 무언가를 찾다가 냉장고 속 물이 눈에 들어왔다. 500ml짜리 물 두 병을 샀다. 10년 넘게 체중 관리하면서 읽은 기사 중 물을 마시면 식욕이 줄어든다는 내용이 떠오른 것도 한몫했다. 자리로 돌아와 물부터 꺼냈다. 배고픈 만큼, 스트레스받는 만큼 벌컥벌컥 들이켜니 금세 2병을 비웠다. 배가 부르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게다가 물은 0kcal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렇게 물로 배를 채운 지 4일쯤 되자 싫증이 났다. 물에는 맛도, 향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먹는 즐거움이 그리웠다. 그래서 포기했느냐? 아니다. 마테차, 옥수수수염차, 탄산수, 1+1 행사 상품 등 매일 다른 종류의 물을 사 먹었다. 덕분에 직장을 관두는 날까지 그 습관을 지킬 수 있었고 체중도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지금도 늦은 오후나 새벽에 출출할 때는 물로 배를 채운다. 남편은 음식이 부족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시대냐며 놀리지만 이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다이어터의 숙명이다.
나에게는 식욕을 해결하는 용도로 마시는 물이 극락조화에게는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식량인 걸 보면 신기하다. 동시에 딱하다. 사람은 생명 활동을 위해 물만으로는 부족해 다양한 영양소를 다량으로 섭취하는데 식물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색무취 무미의 물만 먹어야 하니 말이다.
물과 이산화탄소로 광합성해서 산소와 포도당, 물을 만들어내는 화학식을 떠올리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는 극락조화가 안쓰럽다. 인간도 물만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식물처럼 다른 건 먹지 않고 물만 먹을까? 적어도 나의 경우엔 아니다. 물에서도 맛을 느껴야 한다면서 종류별로 물을 마시는 사람이다. 생명 유지와 관련이 없어도 오로지 맛을 보기 위해 음식을 먹었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물만 먹어도 살 수 있다 한들 이미 ‘맛있는 맛’을 알아버려서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먼 미래에는 캡슐 하나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받을 수 있어서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산다면 맛과 향이 나거나 톡톡 터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미각을 자극하는 캡슐을 먹을 것 같다. 입 속 즐거움을 포기하는 건 힘들 테니까.
지금 물을 마시면서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정도 나누고 한결 가까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극락조화와는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주방에서 요리하면 그 냄새에 시달리기만 할 뿐 정작 맛은 못 본다. 먹는 걸 좋아하는데 그 좋은 걸 공유할 수 없다니! 물만 먹어도 살 수 있어 살찔 걱정이 없는 극락조화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누리는 미식의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