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아래 너와 나
발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하게 된 액태비티는 '해변 승마'다. 발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는 액티비티는 아닌데 액티비티 킬러로서 해변 승마도 무조건 일정에 넣을 수 밖에 없었다. 해변 승마라는 이름은 듣자마자 낭만적이다. '해변', '승마' 따로 따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이 두 개가 합쳐지면서 로맨틱에 정점을 찍는다. 엄마랑 여행 초반에 갔던 길리섬에서도 해변 승마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빠가 합류한 후에 해변승마를 같이 하고자 발리에서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짱구 해변에서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무도 없고 서핑광들만 서핑하기 위해 모이는 해변가들이 쭉 펼쳐진다. 여기에 2곳 정도 해변 승마를 제공하는 업체가 위치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말들이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가 찾은 2곳의 업체는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말들을 아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렇게 동물을 이용한 액티비티는 하면서도 죄책감이 들 때가 있는데, 여기 업체들에 있는 말들은 철저한 관리 아래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승마를 할 수 있었다. 아래 2개의 업체들 모두 비슷한 운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의 상태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하루에 1~2회만 승마 액티비티를 운영하고 몸무게가 75~85kg이 넘는 사람은 이 액티비티를 할 수 없다.
1. Salty cowboy bali
2. Kuta P Stables
두 업체 모두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비슷했는데, 체험 시간에 따라 30분/ 1시간 으로 나뉘기도 하고, 아동용 승마, 사진 촬영이 포함된 승마 등 본인이 원하는 니즈에 맞춰 고를 수 있다. 원래 우리는 지는 태양을 뒤로 하고 석양 속에서 촥~~ 걸을 생각이었는데, 일정상 오전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침에 승마를 하게 되었다. 시간에 맞춰 숙소로 우리를 데리러 온 승마 업체 직원과 이동해 1시간 정도 달렸을까 해변이 근처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 촌구석(?)에 도착했다. 승마 업체에 들어서자 승마 헬맷부터 착용한다.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는데 그 와중에 난 하얀색 헬맷 쓰고 싶어서 머리 사이즈에 맞는 헬맷을 찾아 헤맨다. 혹여나 승마 도중 다리를 긁히거나 할까봐 사전에 직원이 긴바지를 입으라고 당부해서 긴바지 츄리닝을 입고 왔는데 벌써부터 덥다. 옆에서 '제발 만져줘!!!'라고 눈으로 강력하게 말하는 큰 강아지 2마리를 외면한 채 안전에 관련된 안내문에 서명을 하고 인적사항을 적었다.
이제 준비된 말들을 타러 간다. 예전부터 승마를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던 나는 요즘도 승마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말을 봤을 때, 너무 오랜만에 말을 봐서 그런지 왜 이렇게 크고 높게 느껴지는지. 특히 엄마가 탄 검정색의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말은 내 말의 1.2배는 더 키가 큰 것 같이 위엄이 있어 보였다. 내 말은 슈렉 여친의 이름과 똑같은 '피오나(fiona)'였는데, 눈이 정말 순하고 착하게 생겨 이 친구랑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출발해 해변가까지 넓게 펼쳐진 논밭을 걸어갔다. 아니, 근데 여기 사는 주민들도 이게 자주 보는 광경이 아닌지 우리가 관광객인데 되려 우리를 스마트폰으로 찍어댄다. 잠깐 민망하고 쪽팔렸지만 빨리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마음 속으로 '그래, 나는 어떤 나라의 공주야' 라고 마인드컨트롤을 하면서 마을을 겨우 통과했다. 우리가 해변으로 가는 내내 1:1로 붙어있는 직원 말고도 또 한명의 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앞에 먼저 간 다음에 우리가 말을 타고 걸어오는 장면을 내 폰으로 열심히 담아줬다. 정말 열정적으로 찍어주길래 사진 솜씨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게 천국의 문이나 바투르 산 투어 관련해서 일하는 가이드들은 진짜 다 사진천재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사진을 잘 찍지 않을까 싶었다. 나중에 보니 너무 밑에서 올려다 보는 각도라 거의 뭐 통통한 유치원생이 말 처음 타봐서 신나하는 것처럼 나왔더라. 그래도 땀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사진 찍어준 노력이 고마워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번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해변에 도착하니까 진짜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뭔가 물에 직접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이라도 보니까 조금은 더 시원한 느낌인 것 같고, 우리를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하나 없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 우리만 와본적이 있었던가 생각하게 됐다. 아무도 발 디딘 흔적, 모래성을 쌓은 흔적, 버려진 쓰레기도 없는 깨끗한 모래 사장 위로 바닷가 물이 부서져 왔다. 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말의 발이 살짝 잠길 정도의 투명한 물이 찰랑 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차피 이 해변 승마 액티비티는 1:1로 직원들이 붙어서 밀착 케어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속도를 내거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이랑 친해지기나 하자 하는 생각에 피오나 갈기도 여러 번 쓰다듬어 주고 엉켜 있는 털도 풀어줬다.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 딱 우리 가족 셋, 직원들, 말 3마리만 있는 공간은 정말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옛날 귀족들이 유유자적하면서 말 타고 다니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이 여유로움을 나도 더 만끽하고 싶은데, 나시 밑으로 드러난 팔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발리가 워낙 자외선이 강하기도 한데 이 날은 특히나 날이 너무 맑아서 진짜 까매지겠구나(원래도 까만데 어떻게 더 까매질 수 있을까 항상 궁금한 1인..) 생각이 들어 급 우울해졌다. 온 만큼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덥기도 하고 느린 속도가 답답해서 빨리 가줄 수 있냐고 간단한 영어로 직원에게 말했는데 이해를 못하겠다는 바디랭귀지만 돌아왔다. 몇 번 더 시도하다가 포기한 나는 땡볕 아래서 거의 '제발 나를 태워줘'식으로 천천히 자외선을 쐬면서 돌아왔다. 나중에 말에서 내린 후에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리셉션 직원이 한국말로 '빨리'라고 얘기하면 직원들이 알아듣는다는 거다. 왜 당연히 영어를 알아들을거라고 생각했을까. '빨리'라고 얘기할걸.
신기했던 점 한 가지는 말을 타고 오가는 길에서 마주친 자동차들이 꽤 많았는데, 우리가 가까이 가면 말들이 놀라지 않도록 거의 시속 10km/s로 운전하거나 아예 시동을 꺼주는 차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마주오는 차들을 보면서 이 예민한 피오나가 놀라면 어쩌지 생각했는데 차들이 이렇게 배려해주다니 발리 사람들의 친절함과 배려에 다시 한 번 속으로 감동받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공사 현장이 있었는데, 피오나는 그 구간을 지나가는 걸 힘들어 했다. 최대한 지나가기 싫어서 그 구간 직전까지 버티다가 엄청 빠른 속도로 그 구간을 통과하는 피오나를 보면서 시끄러운 소리에 진짜 겁을 많이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태운 말은 이 구간에서 아예 경로를 이탈해 논으로 들어갔다는데, 아빠는 좀 놀랐겠지만 얘기로 들으니까 그 상황이 상상돼서 웃음이 났다.
승마를 마치고 내린 내 엉덩이와 허벅지는 그 모양대로 땀에 젖었고 방금 그늘로 들어왔음에도 내가 새까맣게 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앉아서 시원한 물을 들이키고 물 수건으로 땀도 닦고 있으니 직원분이 바나나 튀김을 내온다. 여기서는 바나나 튀김을 간식으로 꽤 자주 먹는지, 지난 번에 남편과 다른 투어를 갔을 때도 가이드분이 길에서 바나나 튀김을 사서 주신 적이 있다. 더위를 먹은 느낌이라 튀김이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두개 집어 먹는다.
해변 승마 액티비티는 생각보다 단조롭고 지루한 구간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승마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은 살아 있는 동물과의 교감, 이 동물을 길들이고 서로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가 하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질을 파악하듯 이 생명체의 특성을 탐구하고 이 말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상과 훈련을 거듭하며 결국 서로 신뢰를 쌓았을 때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지가 되면 더 이상 내가 지금 느끼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한 긴장감과 땡볕 아래서 천천히 걷는 지루함은 없을 거다. 대신 어떤 목적지를 향해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호흡하는 느낌만 남을 거다. 언젠가는 승마를 배울 기회가 있다면 말과 그런 정도의 신뢰를 쌓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빵빵한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택시에 타는 순간 그 시원함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