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생 임영숙(1)

by 진키

겸손하고 따뜻한 인품을 지닌 사람

영숙(英叔)이라는 이름의 뜻을 풀이해 보면

"꽃처럼 빼어나고 재능 있으며,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

"겸손하고 따뜻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는 이름같이 사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밝은 에너지를 내뿜고 유머러스해서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인터뷰를 요청을 하자 그녀는 한사코 거부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고 너무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담을 이야기도 할 얘기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들보다 배우지 못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어렵사리 그녀를 설득하여 인터뷰를 약속한 날.

이날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세차게 왔다.

장대처럼 내리는 빗줄기에 세상이 흐릿해졌고,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낮인데도 마치 저녁처럼 어두웠고,

창밖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는 쉬지 않고 내리면서도,

또 금세 그칠 듯 반짝이는 변덕을 부렸다.

그날 나는 임영숙 님을 만났다.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잠겨 조용했고,

우산 아래로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만이

유일한 음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 축축한 습기가 내려앉은 방바닥을

지나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점심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직접 무친 가지나물에 더덕무침. 각종 곡물을 넣어

고슬고슬하게 지은 정성스러운 잡곡밥까지..

그렇게 함께 밥을 나누어 먹고 나니

긴장도 조금은 풀린 거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꺼내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말은 조심스레 오갔고,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비로 인해 더 선명해진 어떤 마음이 그날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K장녀 대신 K차녀

그녀는 2남 2녀 중 둘째 딸로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언니는 세 살 때 나무하던 톱을 밟아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치료시기를 놓친 탓에 평생의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몸이 불편한 언니 대신 차녀인 그녀는

집안의 장녀역할을 도맡았다.

집안의 모든 심부름과 두 동생들 돌보기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산속에 깃든 집에서 시작되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때고,

낮에는 바다에 내려가 김을 말렸다.

바다와 산을 오가는 길은 험난했고

부모님은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찾아

바다와 저수지 근처로 집을 옮겼다.

막내 동생과 그녀의 나이 차이는 겨우 5살,

바다로 일을 가신 어머님을 대신해 그녀는 동생들을 돌봤다.

옆집으로 건너가 동생을 포대기로 매어달라며

자신의 등을 내밀던 어린 소녀는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을 그렇게 업어 키웠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거 같아요.

어차피 말을 한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던

가정환경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보니 무슨 꿈을 꾸었었는지

무얼 하고 싶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사느라 바빠 그녀는 꿈을 놓쳤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졌던 탓이다.


17살에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다.

종로에 방을 얻고 동대문 공장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웠다.

당시 함께 완도에서 지내던 청년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데이트신청을 했다.

"만나자고 하길래 무서워서

동생들이랑 친구들 줄줄이 데리고 갔죠.

커피 값이 많이 나왔길래 그게 또 미안해서

내가 그걸 계산하려고 하는데 동생이 말렸어요.

누나는 데이트도 할 줄도 모르냐면서

이런 건 남자가 내는 거래요.

그래놓고선 정작 만남을 동생이 반대했어요.

부모님 근처로 절대 시집가지 말라고요.

누나는 시골에서 벗어나서 살라고요"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이었지만 속이 깊었던 동생은

그녀가 시골에서 나아가 더 큰 세상에서

삶을 살아내었으면 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그녀는 언니의 권유로

한 남자를 만났다.

홀어머니를 정성스레 모시고 산다는 그의 말에,

왠지 모르게 모성애가 자극되었다.

다정한 말투, 배려 깊은 눈빛,

그리고 그럴듯한 장밋빛 미래.

그녀는 결국 그 남자의 감언이설에 마음을 내주고,

결혼을 결심했다.

그렇게 결혼과 동시에 7년을 몸담아

재봉틀을 배우던 곳을 떠나게 된다.

"사장님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쓰임은 시어머니 잘 모시고 살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혼수로 컬러티브이를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를 진짜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하지만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웬만해선 참을 수 없는 시월드

시어머니와의 대립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명절에는 친정을 갈 수 도 없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기에 명절에는

상을 여러 번 차려내야 했다.

남편의 누나들이 각자 시댁에 갔다가 친정으로 넘어오면

그 상도 며느리인 그녀의 몫이었다.

"명절에 친정에 가 본 적이 애들 어렸을 때

한 번 갔으려나요? 멀리 사는 영향도 있긴 하지만

명절에 우리 집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가끔 그렇게 형님들이 오시면 친정에서

우리 아버지가 보내주신 각종 곡식이나 음식들을

시어머님이 딸들에게 다 싸주시는 거예요.

나도 내 아빠가 딸내미 먹으라고 주신 건데

그걸 시어머니가 자기 딸들에게 싸주니까

너무 부에가 나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그녀의 시어머니는 아들을 못 낳으면 집안 문을 닫는다며

산부인과를 가는 매일을 동행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서운하게 느끼지 않았다.

애쓰지 않아도 타고난 복대로 모든 것이 흘러갈 거라고 믿었던 탓이다.

결국 그녀는 86년 1월 10일 아들을

87년 7월 7일에는 딸을 낳았다.

매일같이 노인정에 가시던 시어머니가

노인정에 가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노인정에서 다툼이 있었던 날이었다.

의견이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누군가의 말에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어머님은 좀처럼 참지 못하셨다.

물론, 시어머니를 존중하고 공경하려 애썼지만

어머님의 성격상 어떤 상황에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달기란 쉽지 않았다.

모든 걸 맞춰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머님이 생선을 좋아하셨어요,

내가 살갑고 애교 많은 며느리가 아니라

어머님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내가 어머님한테 할 수 있는 건

그냥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맘껏 요리해서 드시라고

어머님 좋아하시는 식재료를 열심히 사다 드렸죠.

그러다가 친정어머니가 아파서 먹거리를 사다 드리려는데

우리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난 우리 엄마 딸인데 정작 더 오래 함께 살았던

시어머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서로 미워했지만 어쩌면 서로의 취향은 더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친정엄마한테도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복잡해서 눈물이 났어요."


한 번은 그녀가 어머님 앞에서 남편과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안에서 시어머니는 아들의 편에 서서

그녀에 대해 모진 악담을 퍼부었다.

"재수 없는 년이 들어왔다는 둥,

남편 등골 빼먹는 년이라는 둥,

그 당시 드라마에서 보시고 들었던

모든 며느리들을 향한 악담을 저한테 퍼부우셨어요.

나는 진짜 애들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이게 평생 내 가슴에 맺히더라고요.

그때 더 이상 나도 어머님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나도 나를 지키려면 입을 닫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자신에게 모진 말을 쏟아낸

시어머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상처가 깊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한테 그렇게 상처되게 말한 적 없어요.

말로 주는 상처는 평생 이렇게 남잖아요.

주워 담을 수도 없단 말이에요.

상대방한테 다신 안 볼 거처럼

마음이 아픈 얘기나 막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

평소에도 그녀는 말의 소중함을 느끼고

더 다정하게 더 따뜻하게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던 그녀이기에 시어머니의 말은

더더욱 이해가 어려웠다.

"내가 한번 신혼 땐가 너무 힘들어서 집을 뛰쳐나왔어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한테 얘기했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홀시아버지보다는 홀시어머니가 낫다고요.

혼자 밥도 챙겨 드시고 애들도 봐주실 수 있다고요.

너무 힘들었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또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겠구나 싶더라고요"

사소함에 감사함을 느끼고 매사에 긍정적인

그녀의 사고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이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그랬어요.

내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서 마음이 어진 거라고

나는 늘 내 안에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

살면서 그녀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 편에 계속>

keyword
이전 08화57년생 김광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