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죽었다.
전화 한 통 그것이 내가 들은 할머니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나는 할머니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친구이고 자매이고 엄마였다.
죽음이라는 것은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죽은 지 10년이 되는 오늘,
할머니의 기억을 잡아둘 기록을 써보기로 했다.
지금 모두에게 흐릿해져 가는 할머니를 위한
뒤늦은 기록을 남긴다.
1931년생 이관례
할머니의 삶은 어땠을까?
할머니는 해남에서 6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다.
결혼 적령기 중매로 만난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3남매를 낳아 남부럽지 않게 가정을 꾸렸다.
그러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가 4살 때 정치를 하기 위해 상경했고
그곳에서 다른 여인을 만나 또 다른 가정을 꾸렸다.
평탄하고 고요한 삶을 살던 할머니에게 있어
이 일은 생애 처음 겪는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남편을 빼앗긴
할머니에게 우리 아빠는
남편이자 아들이자 삶의 희망이었다.
아빠는 결혼적령기를 조금 넘긴
1985년 3월 10일 엄마와 결혼식을 올렸다.
할머니에겐 그렇게 며느리라는 불편한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들 못 낳으면 우리 집 문 닫소"
며느리의 산부인과를 쫓아다니며 할머니는 의사에게 얘기했다.
"아들 못 낳으면 우리 집 문 닫소 "
그런 시어머니가 부담되고 힘들었을 법도 한데
엄마는 그때 그 말이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이던 딸이던 엄마에겐 엄마 삶에 주어진 복만큼
모든 것이 유유히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복이 있던 건지 아니면 없던 건지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또 다른 세계이자 사랑인 첫 손주를 품에 안았다.
"거참 손주 잘 잘 생겼네"
할머니는 지나다니다가 손주 예쁘다는 소리를
해주는 이가 있으면 주저 않고 슈퍼에 들어가서
음료수라도 쥐어주고 가던 길을 갔다.
할머니의 손주사랑은 온리 아들 사랑에서
손주로 넘어간 또 하나의 애틋하고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1년 뒤 태어난 나란 존재는 할머니에게 있어
소중한 아들손주 이후에 추가로 더해진 덤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
할머니의 삶에 있어서 유난히 거슬리고
속 시끄럽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건 덤으로 태어난 나란 존재였다.
할머니에게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움과 차별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고
사춘기때 그 반항심은 극에 달했다.
그래서 늘 할머니의 말에 반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동시에 할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
내 비뚤어진 애정결핍은 할머니를 더 힘들게 했고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더욱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서로가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우리는
그렇게 상처 주고 서로를 미워했다.
방청소 하지 않는 손녀딸 방바닥에 할머니는 물을 부었다.
물을 부어두면 방바닥이라도 걸레로 훑으며
청소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할머니의 생각이었다.
할머니는 늘 이런 심술궂은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 방바닥에 부어진 물 위에서
<싱잉 인 더 레인>보다 발랄한 발동작으로
첨벙거리며 할머니에게 물을 튀겼다.
그렇다.
나 또한 말 그대로 육아레벨 만렙의
만만치 않은 년이었던 거다.
할머니를 지독하다고 써 내려가는 나 또한
그 지독함을 그대로 닮았던 것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나의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은 할머니와 함께한
시트콤 같은 사건사고들이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