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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Jul 15. 2024

정조대왕의 흔적을 찾아서

수원맛집 첫번째

수원시 일대는 사실상 정조대왕의 수혜로 성장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가며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이곳을 준(準)수도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수원에는 정조와 사도세자를 기념하는 유무형의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매년 10월 수원시는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며 다채로운 부대행사를 열고 있다. 특히 모친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어머, 여긴 꼭 가야해!”라며 냉큼 예약... 이렇게 2023년 가을, 나는 베프 S양과 함께 수원으로 향했다.      


https://korean.visitkorea.or.kr/kfes/detail/fstvlDetail.do?cmsCntntsId=914138     


행사장에 도착하니 궁녀 복장을 한 분들이 서빙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치 결혼식 피로연장처럼 5~6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 몇 개가 야외에 자리했다. 교환학생으로 보이는 외국인 MZ세대들의 모습도 보였다. 인쇄된 메뉴판이 미리 주어졌고 식전차가 나왔다. 작두콩차는 뭔가 건강식품? 같은 느낌이라 그닥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바삭한 부각이 식사 전 입맛을 돋워줬다.  

식전다과
12첩 반상 전체샷

말로만 듣던 12첩 반상인데 1인분에 맞춰 소량씩만 담겼다. 원래 수라상에 오르는 밥은 흰밥과 팥밥 두 종류다. 특이한 것이 팥알은 들어가지 않고 팥을 우린 물로 붉은 빛깔만 낸다. 국은 보통 미역국을 많이 올린다고 들었는데 이날 나온 국은 두부와 쇠고기 등을 넣은 두포탕이었다. 레시피는 구한말 궁중음식 기록을 토대로 호화스러운 음식문화가 발달했던 개성 향토요리를 참고했다고 한다. 

적두수라와 두포탕


기본찬?이라고 할 수 있는 메뉴로는 김치와 콩자반인 흑태증, 영조 때 만들어졌다는 탕평채가 나왔다. 김치는 개성식으로 낙지와 밤, 단감 등을 넣은 보김치. 과일에 해물 같은 호화로운 재료가 들어가는만큼 양반가에서 선물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흑태증은 뭐...그냥 우리가 아는 그맛이다. 청포묵에 쇠고기, 미나리, 숙주, 달걀, 붉은고추로 만든 탕평채는 다양한 색깔로 당파를 빗댔다고 알려졌다. 가볍고 산뜻해  부담없이 넘어간다. 

개성식 보김치
흑태증
탕평채

한식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개노답 전 삼형제가 나왔다. 표고와 민어로 만든 전유어+화양적 조합이다. 추석 차례 메뉴로도 알려진 화양적은 쇠고기, 돼지고기, 도라지, 잣, 달걀, 두부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호화스러운 느낌이 든다. 

화양적과 표고, 민어전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반찬은 생전복증과 갈비증, 삼합장과, 그리고 족편이다. (전부 고기 아니면 해물...) 향토요리 중 섭산적이라는 게 있는데 고기를 다져 두부와 섞은 메뉴다. 생전복증은 딱 비주얼이 섭산적과 비슷한 느낌이다. 

양반가 메뉴 중 게감정이라는 것도 연상됐다. 마찬가지로 다진 쇠고기, 게살, 두부를 섞어서 게 등딱지에 채운 찌개요리임. 두부는 양을 늘리는 역할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식감을 부드럽게 만들고 씹기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 부재료는 두부 외에 쇠고기와 석이, 표고버섯 등이 들어갔다. 

생전복증

요즘이야 전복 양식이 가능해져 가격이 많이 다운됐지만, 이전에 전복 채취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귀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해녀들은 한겨울에도 알몸으로 조업을 했다고 하는데, 진상품을 관리하는 지방관들의 수탈이 심해 한때 정조대왕은 좋아하던 전복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갈비증


갈비증은 소갈비를 기본으로 닭고기와 전복이 들어갔다. 여러 가지 고기, 해물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개성 향토요리인 개성무찜과 비슷해 보인다. 고기를 아낌없이 사용한 만큼 궁궐이나 대가집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고지, 표고, 달걀이 고명으로 올라간다.  

삼합장과

호화로운 궁중음식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메뉴가 바로 삼합장과다. 전복과 홍합, 쇠고기가 삼합(三合)의 주인공이다. 사실 원래 재료는 쇠고기가 일종의 사이드 역할이고 전복, 건홍합, 건해삼이 들어간다. 다만 해삼은 생물을 쓰기 곤란한 것이 조리 중 열에 의해 녹아버리기 때문. 과거에는 말린 해삼을 불려서 썼다고 하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부피가 줄어들어서도 있지만 말리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운데다 생 해삼에 비해 훨씬 깊은 풍미를 내므로 같은 해삼이지만 대우가 다르다. (참고로 몇 년 전 홍콩여행때 식재료상에서 본, 손바닥 절반만한 건해삼 가격이 한국돈 30만원 정도....ㄷㄷㄷ) 

족편

말랑쫄깃한 족편은 옛 선조들이 가장 맛있는 안주 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콜라겐이 풍부한 근육과 연골 등을 장시간 삶았다가 식히면 젤리처럼 굳어진다. 족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주 재료가 우족이었던 데서 유래했으며 주로 설날에 먹었다. 지금은 잊혀진 한과류 중에는 각종 한약재와 꿀을 넣은 시럽을 고기에서 나온 아교로 굳힌 '전약'이라는 것도 있다.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다 보니 요즘은 보기 드물어졌다.

섭산삼

메인상에 나왔지만 사실상 디저트라 할 수 있는 섭산삼은 이날 제일 맛있게 먹은 메뉴 중 하나다. 더덕을 두들겨서 찹쌀반죽에 튀기고 꿀에 절인 과자로, 대장금에도 나온 적이 있다. 뿌리 채소인 더덕이 디저트에 어울릴까 미심쩍었는데 특유의 향이 단맛과 자연스럽게 조화된다. 

디저트 다과
과자류를 좀 더 가까이서 찍어봄

디저트 다과상에는 석류알과 채썬 배 등이 들어간 화채가 제공됐다. 약과와 흑임자다식에 인삼편을 꿀에 절인 정과, 감로빈이 조금씩 곁들여진다. 감로빈은 납작한 찹쌀떡에 생강 대추 귤껍질 유자청 등을 올렸다. 이날 메뉴에는 없었지만 유명한 궁중 여름 음료로는 송홧가루를 꿀물에 탄 송화밀수도 유명하다. (그런데 재료 구하기가 헬급...) 


과하지 않은 간에 고급스러운 한상이었지만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면, 여러 종류 반찬의 양념과 부재료가 왠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표고, 석이, 달걀, 잣 등이 거의 공통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과거에는 특정 재료를 충분히 공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요즘보다 오히려 종류는 다양했다고 한다. 가령 지금은 잘 먹지 않는 천초나 호박꽃, 순채, 마름 같은 것들이다. 구하기 어렵고 잊혀진 재료들을 다시 발굴하는 노력이 이뤄졌으면 싶다.      


사도세자의 눈물, ‘단오카페’에서 맛본 제호탕     


이번에는 행사장 밖에서 만난 맛집이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가 사망한 임오화변은 음력 5월, 양력 기준으로 7월에 있었던 일이다. 찜통더위 속 극심한 갈증을 느꼈을 사도세자에게 한 궁인이 시원한 음료를 건넸고, 그것이 바로 제호탕이라고 한다. ‘제호’라는 이름은 불교용어로 부처가 내리는 궁극의 음료를 뜻한다. 원래는 우유나 발효유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구하기 힘든 우유 대신 사인, 백단향, 그을린 매실인 오매 등을 사용해 보양음료를 만들었다. 

제호탕에 쓰이는 재료들

매년 단옷날 왕은 신하들에게 여름 더위를 이기라는 의미로 부채와 제호탕을 하사했다고 한다. 제호탕에는 슬픈 전설(?)도 있다.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한음 이덕형은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무렵 궁궐 근처에 별채를 마련해 두고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그가 아끼는 첩실이 살림을 돌보고 있었다. 어느 더운날, 퇴청하던 이덕형은 시원한 제호탕 생각이 간절했는데 집에 당도하자마자 첩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 제호탕을 내놓았다. 그런데 막상 이덕형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날로 발길을 끊었다고....오성 이항복이 이유를 묻자 “국사로 정신이 없는데 여색에 마음을 뺏길까봐”라는 이유를 들었다. 챙겨줘도 지X이냐?

살얼음 제호탕

아무튼 ‘한약’이라는 이미지 때문인가 보통 여름 한철 한약방 같은데서 팔기는 하지만 겁~~나 비싸 쉽게 사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수원 행궁동에 가면 ‘단오’라는 카페에서 보통의 커피전문점 정도 가격으로 제호탕을 맛볼 수 있다. 살얼음을 채운 잔에 담긴, 달콤쌉쌀한 제호탕을 한잔 마시면 무더위가 오기 전 ‘예방주사’를 맞는 듯한 느낌이다. 이곳에서는 직접 만든 호두정과와 물에 타 마실 수 있는 제호청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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