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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거북이가 이기는 경주

by 알쓸채은

학기말 교과우수상 시상식 관전 포인트


고등학교에서는 학기말 방학식 때마다 보통 과목별 상위 4% 이내 학생들에게 교과우수상을 시상한다.


방학식에는 교과우수상 수상자들 중에 각 학년 전교 1등이 방송이나 단상에 올라 대표로 상을 받는다.


예전처럼 전 과목 합산 석차가 나오지 않는 요즘, 주로 교과우수상 과목 수가 많은 학생이 대표 수상자가 된다.


안타깝게도 대표 수상 영광을 놓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실이나 단상 아래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다.


이때 은근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는 '이번에는 어느 학년 대표가 교과우수상 과목 수가 제일 많은가'다.


이번 우리 학교 여름방학식에서는 1학년이 우승했다. 그것도 1학년 전 과목 올킬.

(2학년도 전 과목 올킬이었지만 시험 친 과목 수 자체가 작았다 ㅎㅎ)


여기저기서 부러움 반, 질투 반 섞인 말들이 오간다. 그때 우리 반 한 아이가 툭 던진다.


"청운고에서 전학 온 애 있다더니, 중간고사 때 1등 한 애가 결국 다 해 먹었네?"



고등학교 내신 홈경기의 강자


요즘 고등학교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 가운데 내신 비중이 커지는 탓에 고등학교 학적 관리에 다양한 변주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학군지에서 비학군지로의 입학이나 전학, 그리고 특목·자사고에서 일반고로의 전학이다.


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소득 수준이 다소 낮고 일대에서 ‘공부 안 하기로’ 꽤나 유명하다.


그런데 최근 도로가 하나 더 뚫리면서 산 너머 학군 좋은 동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적 변주의 대상이 됐다.


이렇게 건너오는 아이들의 목표는 딱 하나다.

"여기서는 내가 무조건 1등 한다."


정든 중학교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동네로 입학이나 전학을 선택하는 아이들을 교사 생활 15년 동안 매년 한두 명씩 본다.


1학년 입학 때부터 멀리서 원정온 학생, 1학년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전학 온 학생, 1학년 1학기와 2학기 버티다 결국 넘어오는 학생 등 다양하다.


하지만 막상 와보면, 이 아이들 대부분 전교 1등은 물론 전 과목 1등급도 쉽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공부 잘하는 학교에서 온 전학생이 기존 전교 1등과 살벌한 경쟁을 펼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내 경험상, 그 학교에서 원래 1등 하던 아이가 계속 1등 한다.


살아보니 어떤 학교, 그룹, 조직이든 그 안에 고수가 숨어 있다.


이 고수들의 특징은 편법이나 꼼수 없이 묵묵히 자기 페이스로 오래 달린다는 것.


학군지 명문 자사고 출신의 날쌘 토끼가 갑자기 경기장에 뛰어들어도, 답답할 만큼 꾸준히 달리는 거북이가 결국 이 동네 홈경기의 강자다.



잘 사는 아이가 되기 위해 길러줘야 할 00


공부를 잘하기 위해,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


맞는 말이다.


한 우물을 파도 물 나오는 자리를 파야 한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공부에서만큼은 결국 많이 하는 놈이 잘하는 놈을 이긴다.


그리고 인생에서 전략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이의 인생을 멀리 바라봤을 때


수많은 시련과 유혹이 기다리고 있는 삶에서 결국 승부를 가르는 건


꾸준히, 제 길을 묵묵히 걷는 거북이의 그릿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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