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친구가 늦는다고 한다.
바깥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려고 했지만, 유독 날씨가 춥다.
하는 수 없이 먼저 가게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실내 공기가 느껴졌다.
약속 장소는 모던 바였다. 강남에 이런 곳이 있다니, 처음 알았다.
강남 거리는 두 얼굴로 나뉜다.
한쪽은 붐비는 사람들과 음식점, 그리고 카페가 있다. 가게의 주인들은 열정적이고, 거리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활기차게 숨 쉬는 거리다.
반대편 거리도 활기찬 건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거리가 바로 그 거리다.
이쪽 역시 젊은 사람이 많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아쉬울 것 없는 열기가 가득하다. 술 취한 남녀가 서로 담배를 태우고, 흘깃 거린다.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고, 모텔방이 있는지 체크한다.
난 그들과 눈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거리 한복판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계단 마디마디에 떨어진 삐끼가 보였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들이었다.
바 안은 거리보다 어두웠다.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술과 달큼한 과일 냄새가 옅게 흩어져 있었다. 나무 향수 냄새도 섞여 있었다.
큰 유리창 너머로 건너편의 클럽과 포장마차가 보였다. 테이블에 앉아 모히토를 한 잔 시켰다.
순간 어떤 작가가 모히토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서 그랬다.
모히토가 나오고 잔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마침 포장마차에서 한 커플이 어묵을 들어 올리자,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보였다. ‘어묵 국물이나 홀짝일 걸’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켁켁.’
첫 모금에 기침이 나왔다. 손으로 입을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모히토가 너무 차가웠다. 기침을 하며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바 안을 살폈다.
바 중앙에는 작은 모니터가 보였다. 옛 영화의 한 장면과 함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레스턴이 사랑하는 상대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화면 하단에는 음악 제목이 조그맣게 적혀 있었지만, 내 자리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자주 듣던 음악이었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목을 뻗었지만,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녀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다시 확인해야겠다.
“훈아! 얼마 만이야!”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검은 셔츠와 딱 붙으며 몸매가 돋보이는 청바지,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은별이었다.
2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크게 변한 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고, 긴 갈색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2년 만인가?”
내가 말했다. 은별과는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오랜 친구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공항에서 배웅하던 날이었다.
“여기 베일리스 한 잔 주세요.”
은별이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작은 식도로 레몬을 다듬고 있던 바텐더는 은별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어?”
은별이 물었다.
“나도 방금 들어왔어.”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접시에는 말린 코코넛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은별은 접시를 살펴보다 잔을 발견했다. 잔에는 모히토가 절반 정도 차 있었다.
“벌써 거의 다 마셨네.”
은별이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음만 빼먹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됐네.”
“예전부터 얼음 씹는 거 좋아하네.”
“입이 심심하지 않아서 좋지. 이번에는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
난 잔을 흔들며 말했다. 잔 속에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이틀? 잠깐 서류 작업할 게 있어서 들어왔어.”
은별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가까이 앉자 과일 냄새와는 다른 오렌지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잔을 빼앗아 남은 모히토를 모두 마셔버렸다. 잔에는 얼음만 남았다. 은별은 잔을 흔들었다.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숙취 밸런스는 맞춰야지! 하나 더 시켜라!”
난 피식 웃었다.
은별은 털털하고 주량이 넘쳤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와 성격 덕에 술자리에 초대받곤 했다. 키가 큰 편이라 비율도 좋았고, 굽 있는 신발을 즐겨 신어 그 키가 더 돋보였다. 외모 외에도 누군가를 챙겨 주는 성격이라, 동성 친구들과도 친했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내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것도 은별이었다.
개강 파티에서 어쩌다 옆자리에 앉게 됐다.
짧게 대화를 했는데, 건설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따위의 대화였다. 난 궁금한 게 없어서, 질문은 안 했던 걸로 기억한다.
술이 계속 들어가다가, 한 선배가 벌주를 타고 누군가 벌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내가 제비 뽑기에 걸렸고, 혼자 감당이 안 되는 양이라 곤란했었다. 은별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테이블을 한 바퀴 돌며 벌주를 나눠 마시자고 제안했다.
은별이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동조했다. 하지만 신입생의 술을 마셔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술자리는 얼른 누군가 취해야 재밌는 법이니까. 벌주는 금방 테이블을 돌아, 다시 내 앞으로 도착했다.
절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걸 전부 마신다면 꼼짝없이 취할 게 뻔했다.
이때 은별은 잠깐 눈치를 보더니, 손을 뻗어 내 손에 쥐어진 잔을 낚아챘다.
그리고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 후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쓰러졌다.
“별. 우리 개강 파티했을 때 기억나?”
내가 말했다.
“응, 기억나지. 내가 네 대신 술 마셨던 거”
“그때 왜 그랬어?”
난 은별을 쳐다보며 물었다.
은별은 내 얘기를 듣고, 말린 코코넛을 집어 먹었다. 바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별이 답했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은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왜 친해지고 싶었는데?”
나도 같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랬겠냐. 네가 신입생이었으니까 마셔준 거지.”
“신입생이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남녀를 한 곳에 모아두면 없던 마음도 생기고 그런 거잖아.”
은별은 예전부터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했다.
“그런 말을 잘도 하네.”
내가 말했다.
“이제 다 옛날 일이니까.”
은별이 웃으며 말했다.
때마침 그녀가 시킨 베일리스와 새로운 모히토가 나왔다. 바텐더는 두 잔 모두 은별 쪽에 두었다.
은별은 모히토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자기 잔을 들어 보였고, ‘짠’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잔에 맞췄다. 난 아직 잔을 잡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잔을 들어 은별을 따라 같이 소리를 내주었다. ‘짠’
바의 음악이 바뀌었다. 모히토를 들이키며 고개를 살짝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음악의 제목이 보였다. 은별도 내 시선을 따라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Music title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인공 지능이 발달해도, 악사와 영화감독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소설가도!”
은별이 뒤늦게 끝말을 올리며 말했다.
은별의 말에 난 끄덕였다.
사진 1 : bakhodirjon adbduraimov
사진 2 : qui mguy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