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아빠가 떠나면서 꼬마는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됐었다.
아빠의 책방은 자연스레 엄마의 차지가 됐고, 엄마는 원래 살던 집을 처분하고 꼬마와 작은 빌라에 들어갔다.
빌라의 창문 너머에는 녹슨 철제 방충망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잡고 흔들면 검은 먼지가 일렁였는데, 그럴 때마다 잔기침이 터져 나왔었다. 건물의 층수는 낮다 보니, 창밖으로 꿉꿉한 쓰레기 냄새가 바로 올라왔었다.
꼬마가 답답함에 베란다로 나가면, 옆집에서 잔뜩 쌓아둔 화분 탓에 오히려 산만해졌었다. 답답함은 사라졌으니, 마냥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책방에서 밤늦게까지 일했었다. 엄마가 집에 없으니, 꼬마에게 식사는 늘 혼자만의 일이었다.
가끔 꼬마의 삼촌이 놀러 와 밥을 함께 먹었다.
삼촌의 손에는 늘 새로운 게임기와 cd팩이 들려 있었다.
며칠간은 재밌었지만, 외로움이 사라지는 건 일시적이었다. 모든 게 질리면 꼬마는 브라운관 티비로 채널을 계속해서 돌리며 시간을 때웠다.
하루는 꼬마가 집 앞 분리수거 장에서 노트북 한 대를 발견했었다.
분리수거장 옆에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통이 저항 없이 닫히면서 음식물 액체가 튀었는지, 노트북에는 은은한 불쾌한 냄새가 났다.
꼬마는 노트북을 집으로 가져와 물수건으로 적당히 닦아낸 후 전원을 눌렀다. 화면은 깜빡였지만, 작동에는 이상이 없었다.
노트북을 발견하고, 꼬마는 엄마와 서점에 놀러 갔었다.
엄마는 꼬마에게 사줄 자습서를 고르기 위해 문제집 코너를 둘러보고 있었고, 꼬마는 문제집 코너와 붙어 있는 소설 코너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한 권의 소설이 꼬마의 눈에 들어왔다. 꼬마는 그 소설을 뽑아 들고 엄마에게 다가가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책의 표지를 보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책 표지에는 검은 배경에 어린 양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낯선 양은 어째서인지 우울해 보였다.
엄마의 표정을 읽은 꼬마는 다시 한번 말했다.
평소에 무언가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꼭 사서 읽고 싶다고. 엄마는 자습서를 내려놓았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꼬마의 손에는 <사냥철이 다가오면 어린 양들은 도망쳐요.> 라는 소설이 들려 있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글을 떼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맹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거지만. 사전적 의미에서의 문맹은 아니었다.
다만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다. 말과 글이 또래보다 느린 것과는 결이 달랐다.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무의식의 난 글자 해석이라는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조금 원초적으로 접근했던 거다. 생존에서 글자는 도움 되지 않는다. 생명은 육체적 힘으로 사냥하고, 사냥물을 섭취함으로써 생존하는 것이지, 글자를 새김으로써 생존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생명 중에서 인간은 그날 하루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리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그 본능이 발현됐던 것 같다.
꼬마는 엄마가 소설을 사줬음에도 글을 읽을 수 없어 너무도 답답했다.
소설에 어려운 단어가 많은 탓이었다.
그러다 집 근처에 구청이 생각났다. 구청에는 오래된 도서관이 있었다. 꼬마는 곧바로 구청으로 달려가 너덜거리는 백과사전을 한 권 빌렸다.
백과사전을 집으로 가져온 꼬마는 한 글자, 한 글자씩 디뎌가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백과사전과 소설을 번갈아 보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을 거다. 하지만 꼬마는 무언가를 느꼈다. 재미였다.
눈이 읽은 글자를 대뇌 신경이 해석한 끝에 만들어낸 상상은 충격적이었다. 소설이란 그렇다. 화자가 무슨 의도로 글을 쓰건 그건 화자의 의도일 뿐, 독자는 화자가 만들어낸 그 이 상의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일련의 상황에 대해, 잠깐 시간 내어 문맹의 꼬마에게 감정이입하길 바란다.
처음으로 상상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니까.
사진 : drown_in_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