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창문 틈 사이로는 도시 소음이 적당히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서둘러 아인슈페너를 들이켰다.
"행복은 인간을 갉아먹는다."
맥락은 없다. 갑자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행복을 좇는 건, 여행을 준비하는 것과 닮아 있다.
어느 날, 바닷가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숙소를 예약하고 먹을 음식을 생각하며 설렘에 잠 오지 않던 밤이 떠오른다.
다음 날, 난 바다를 보고 실망했다. 아마 기대감이 컸던 탓일 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서둘러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감에 하루를 망칠 게 뻔하다.
잠시 생각하다 결정을 내렸다.
난 실망을 감추려 실망에 할애할 시간을 잠시 미뤘다.
인간은 실수를 저지른다. 행복을 목적지로 삼는 것 같은 게 바로 실수다.
이 실수를 깨닫는 건 도착의 순간이다. 도착의 순간, 더는 갈 곳이 없다. 마음속은 텅 비어버리고, 텅 빈 마음속에 자리 잡은 도착의 행복조차, 조금씩 형체를 잃어간다.
그다음 역시 똑같다. 행복의 소실에 대한 상실감, 그것에 할애할 시간을 잠시 미룬다. 계속.
책상 끝에 놓아둔 담배를 집어 들어 깊게 들이마셨다.
후. 둥근 연기가 입과 코를 타고 몸으로 스며들었다가, 입술틈 사이로 밀려났다.
창문 한 뼘 중에 밤마다 가로등과 네온사인 빛이 절묘하게 침대의 머리맡을 비추는 곳이 있다. 잠이 깨서 구겨둔 옷으로 가렸는데, 대충 가려둔 탓에 여전히 푸른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그 덕에 담배 연기는 부드러운 해(바다海) 색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렁였다. 일렁이는 연기는 바닥에 뭉개졌다가, 천장을 향해 가볍게 피어오름을 반복했다. 그러자 천장에 맑은 바다가 펼쳐졌다. 평온한 바다는 그 안에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담배 필터가 모두 타버렸다. 몸을 책상 쪽으로 돌려, 다 태운 담배를 책상 위로 올려두고, 새 담배를 집은 후 불을 붙였다. 담배를 입에 문 상태로 책상을 살피니, 잿가루가 공책 위로 흩뿌려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책을 들고 툭툭 털어냈다.
그러자 문장이 다시 보였다.
[달을 바라보며, 별에 대한 동경을 간직하곤 했다.]
아마도 꼬마는 달에 가지 못할 거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거고, 아마도 영원히. 그리고 잊힐 거다. 이게 이 소설의 결말이다.
“훈아, 내가 죽으면 화장하고 남은 재는 달에 뿌려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 말에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물었다.
“… 왜 달이야?”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얕은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에 난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자신의 말라버린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냈다. 눈 밑으로 까끌거리는 촉감이 스쳐 지나갔다. 불쾌한 촉감이었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더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랐다.
“엄마도, 우주로 가고 싶었거든…”
엄마는 나지막이 말했다. 자연스레 엄마의 시선이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창가를 바라봤다.
마침 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구름 가린 하늘에 달은 희미하게 보였다 말았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엄마도?”
내가 물었다.
“응.”
“나 그 말 처음 듣는 것 같아.”
“처음은 아닐 거야… 아닌가?”
엄마는 응석 부리며 답했다.
“아닐 거야, 달은 내가 가고 싶어 했잖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둘 다 달의 같은 표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함은 없었다. 날개가 있었다면, 같은 속도로 달을 향해 비행하고 있었을 거다.
이렇게 몇 분의 침묵이 이어지고, 침묵이 깨지며 마저 대화가 이어졌다.
“엄마, 달은 나랑 같이 가자.”
“그러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게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나랑 가자.”
“……사랑해.”
이 말을 끝으로 엄마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는 엄마와 달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하룻밤새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돌아가신 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기억이 소실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의 기억에 남는 대화가 남아있었지만, 이날은 아니었다.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고 다음 날, 엄마는 달에 가지 못했다. 대신 우주보다 좁디좁은 유골함에 들어갔다.
유골함을 든 채, 강가의 여울 앞에 섰다.
바위틈에 물줄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을 여울이라 부른다. 작은 물줄기가 강을 타고 내려와 바위틈을 헤집고 들어간다. 세월이 흘러 벼려지고, 깨지며 여울이 생긴다.
행복 또한 마음에 스며든다. 다소 빠를지, 아니면 느릴지는 중요치 않는다. 서서히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꿈을 꾸며 행복을 찾았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꿈의 근원이 사라지고 나서, 내 마음속 행복은 자유분방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마음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모난 곳에 닿으면 마찰이 일고, 까끌거렸던 곳은 사포질 돼 마음은 둥근 모양으로 변모했다. 둥근 곳은 채워지지 않고 공허해졌다. 마음의 텅 빔을 인식한 행복은 이내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이 행복이 마음에 스며들며 일어난 일이다.
이것이 행복이 인간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한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간단하다.
날개 없는 사람에게, 날개의 존재를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때로는 행복을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 존재를 모르는 이에게 행복의 존재를 각인시키면 불안하고 겁먹는다.
아마도 자신의 행복을 의심해서 그럴 거다. 행복에 대해 말한 사람은 자신의 말이 오해를 부른 걸 깨닫는다.
“... 넌 이미 행복에 닿아 있었어.” 뒤늦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은 다시 편안한 상태로 돌아간다.
안타깝게도 마음이 편안해진 사람은 위로받은 이가 아닌, 위로를 건넨 사람 자신이다.
누군가는 괴인으로 부를지 모를 한 작가는 소설 속 대화에서 자신을 담아냈다.
글자로 된 대화는 복잡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영화로 옮겨 우리의 하찮은 통찰력을 늘려줬다.
소설 <여울의 여명>을 각색해 만든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이런 대사가 오간다. 프레스턴의 친구 제시카는 자신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떠난 건 떠난 거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일단 잊는 것부터 시작해 봐. 어떤 게 떠오르니?”
오랜 친구의 물음에 프레스턴은 목이 다 쉰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사랑.”
이 장면을 소설로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은 ‘유치하다.’였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소설을 향해 비난 섞인 말을 쏟아 냈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간 말과 단어는 마음에 뿌리내려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내게는 두 명의 사랑이 있었다. 엄마는 원하던 꿈을 저버리고 내가 행복해지길 빌며 살았다. 날 사랑으로 보듬았었고, 생각보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잠시 내 마음에 머물렀다가, 자살했다.
딱히 떠난 사람을 회상하는 버릇은 없다.
다만 사랑이란 말이 눈에 비춰질 때면, 가끔 머물렀던 자리에 그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보였다. 뿌리 뽑았다고 생각했지만, 구름처럼 떠다니며, 어느새 스스로 세상을 만들어 버린다. 이처럼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사랑 같은 낭만 섞인 말이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현실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추억 속 세상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모순을 피해,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난다.
세 번째 이유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나는 파라다이스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존재 자체를 경멸했다. 환상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사랑이 사라졌음을 눈치챘을 때, 그 존재를 처음 인정했다.
집에 있으면서,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글을 쓰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행복의 순간에 있었으면서, 행복을 꿈꿨다.
욕심의 대가는 가혹했다.
아까부턴가, 창문 밖으로 눈이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축축한 아침, 문득 든 생각이었다.
컵을 들어 올렸다. 이런 딴생각을 하다 보니, 크림만 모두 마셔버렸다.
크림을 좀 더 만들어야겠다. 손을 뻗어 찬장에 올려 둔 우유갑을 들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인슈페너를 꿈꾸며 살았더니, 찬장에 우유 한 컵 남지 않아 버렸다.
사진 : josh nutt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