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아진 leeAjean Sep 05. 2024

[소설] 01화_
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추운 날이면 아인슈페너가 마시고 싶다.
 


우선 포트에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찬장에서 믹스 커피를 꺼내와 봉지의 끝부분을 뜯고 컵에 붓는다. 컵을 하나 더 준비한다.


 두 번째 컵에는 우유를 절반까지 채우고 설탕을 세 스푼 넣은 후 전자렌지에 돌린다. 이렇게 데워진 우유를 거품기로 1분 정도 섞으면 크림이 된다.



 때맞춰 포트에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포트의 전원을 끄고 믹스 커피와 데운 물을 섞는다. 수저로 한 두 바퀴 돌리자 고소한 커피 향이 퍼진다.

 같은 수저로 크림을 떠서 믹스 커피 위에 조심스럽게 올린다.



 아인슈페너가 완성됐다. 이제 마시기만 하면 된다.


 아인슈페너를 마실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커피와 크림을 동시에 마시는 걸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모르게 크림만 먹어버릴 수 있다, 그럼 쓴 맛만 남는다. 의식했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크림을 입술에 걸친 채 커피만 마시면 컵에는 느끼한 단맛만 남는다. 이것 또한 낭패다.


 '쪽' 소리를 내며 키스처럼 마시는 게 중요하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



 책상으로 아인슈페너를 가지고 왔다. 혼자 쓰기에는 확실히 널찍한 책상이다.



 연필꽂이에 안 쓰는 펜과 잡동사니가 가득 꽂혀있다. 이 많은 것 중 자주 쓰는 건 sarasa 0.3mm 펜과 담배,라이터 밖에 없다.


 나머지는 시간 날 때 버려야 하는 데, 정신이 맑을 때면 늘 그걸 까먹는다.



 의자에 대충 기대어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야 하지만, 오늘은 귀찮다.


 팔을 뻗어 담배와 라이터를 집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켰다. 고개를 위를 향했다.


 후. 허공에 입바람을 불어 연기를 천장으로 불러 세웠다. 연기가 툭 퍼졌다. 불붙은 담배를 책상 끄트머리에 올려두고, 고개를 내려 다시 책상 쪽을 바라봤다.



 책상 구석에 공책이 놓여 있었다. 공책을 몸 쪽으로 당겨서 가져왔다. 공책 상단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달을 바라보며, 별에 대한 동경을 간직하곤 했다.


 언제나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러 영감이 글귀를 스쳤음에도 결과는 비슷했다.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하찮은 기억이고, 잊기 쉬운 기억이다. 다만 그런 기억은 되살아났지만, 큰 줄기는 흐릿하게 흘러가버린다.


 깊은 생각, 깊은 대화, 깊은 관계, 깊은 사랑. 차례로 생각이 스쳤다. 생각의 빈자리, 모든 것이 떠나간 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다.




 그래, 바로 그날이다.


 문장은 밤이 새벽에 스며들기 직전의 경계에 태어났다.



 난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불편할 법도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잔기침의 기억도 함께한다.



 병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기댄 채, 병원의 특유의 소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몰래 소리에 집중했다.



 환자들의 얕은 움직임에 살랑이는 커튼 소리, 


 환자의 가족들은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달그락 거렸고, 


 누군가는 속삭였으며, 


 또 다른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도 곧 있으면 진행될 마음속 어딘가의 소실됨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겠지. 


 기다리지만, 기다리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간호사들은 병동의 소음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이 풍경에 자연스러워진 자신의 보며 의문을 품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여러 감정이 어떠한 흐름 속에 뒤섞여 갇혀 있었다.




 “훈아, 내가 죽으면 화장하고 남은 재는 달에 뿌려 줘.”


 껄끄러운 숨소리는 듣기 거북했지만,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똑똑히 들렸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살이 빠지고 있었다. 


 쇄골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 파고들어 있었고, 더듬대는 손바닥에 펼쳐진 주름은 간격 사이사이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삐죽 튀어나온 맑은 손톱만이 엄마의 젊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피했다.


 눈을 옆으로 돌려 침대 모서리를 쳐다봤다. 


 철재 재질로 만들어진 침대의 모서리는 주변의 것을 왜곡되게 비추고 있었다. 엄마의 쭈글쭈글한 피부가 뻣뻣하게 펴져 보인다던가, 손가락이 더 가느다래 보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곡 끝에는 훌쩍이며, 눈시울이 붉어진 한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었다.




 달이라.


 엄마의 말 한마디에 우주로 갈 그럴듯한 계기가 생긴 순간이었다.


 사실 이 계기가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우주 비행사를 꿈꿔왔었다.


 어쩌다 그런 꿈을 꿨는지는 모른다. 먼 하늘을 바라보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저 호기심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가 날 우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내 손마디는 밤 끝을 늘 기다렸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또래의 친구보다 성적이 좋았었다. 앞날이 창창한 꼬마였다.


 이 상태라면 우주로 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 그 꼬마는 무얼 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꼬마는 아직 우주로 가지 못했다.




 27살이 된 꼬마는 밤이 힘들어졌다.


 누구에게는 많고, 누구에게는 적은 상대성이 짙은 나이가 됐다.


 나이는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


 누군가에겐 우주의 시간에서 한 점에 불과한 짧은 순간같이, 다른 이에겐 중력장에 갇혀 늘어진 시간처럼 느껴진다.


 꼬마는 인생 궤도에서 어떠한 시공간의 좌표에 갇힌 셈이었다.





 간혹 우주와 관련된 책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아직 우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달과의 물리적 거리만이 꿈을 향한 진행의 척도는 아닐 테지만,


 지금까지 꼬마가 걸어온 길은 달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에 대한 동경을 찾아 행복을 뒤쫓았고,



 때로는 소설을 썼고,


 좌절에 허우적거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사랑에 빠졌었다.


















사진 : hanbin cho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