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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진 leeAjean Sep 23. 2024

[소설] 20화_어영부영

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2









24


 눈을 떴다. 


 익숙한 노랫소리가 머릿속에 맴돌며 잠에서 깼다. 음악을 듣는 꿈을 꾼 것 같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감을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주기적으로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데, 몸을 세상에 맡기면 이런 상황이 펼친다. 


 기억 또한 끊어졌다 한들 파편화된 기억을 조합하면 유추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숙취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가래가 끓는다. 


 눈을 비비며 침대 옆 책상에 올려진 페트병이 보였다. 손으로 뚜껑을 따고 안에 가래를 뱉었다. 


 이대로 계속 뒹굴거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둘러봤다. 휴지 뭉치, 흐트러진 이불, 마룻바닥에 떨어진 핸드폰까지.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몸만 침대에서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건지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순간 심장이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핸드폰을 충전기에 꼽고 화면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화면이 켜졌다. 우선 문자 기록을 살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있었다.



 [지금 술자리 끝났나요? 끝났으면 아까 만났던 벽 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도 여러 통 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일단 무시하고 다른 기록들을 살폈다. 은별과 술을 마시기 전 주고받은 문자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은별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아, 어제 나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아? 너랑 헤어지고 나서 말이야." 


 남녀 사이에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동요를 숨기려고 애쓰며 말했다.



 "기억 안 나?" 

 은별의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깬 듯, 쇳소리 같은 잡음이 섞여 있었다.


 "... 응,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은별의 말을 듣고도 어젯밤 일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내리며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깊어질수록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우려한 일이 일어났다면, 오늘 난 유일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었다.


 "너 이상한 생각 했지? 상상은 작작하라고." 

 은별이 즉답하며 평소처럼 깔깔거렸다.


  "뭐?"


  "너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더니 바로 뻗었잖아. 테이블에 남은 술까지 다 들이켜고는..."


 "그랬었어? 그다음에는?"


 "내가 택시 잡아서 집에 데려다줬지. 그때 완전히 곯아떨어져서, 업고 올라오느라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어."


 "우리 집 어딘지는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말해 준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은별의 목소리에는 으스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했었나?"


 "뭐, 꽤 예전 일이긴 하지."


 "아무튼 고마워, 나중에 한 턱 쏠게."


 "쏠 거면 오늘 쏴. 이따 밤에 강남 들릴 일 있어서, 그때 보면 되겠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헛다리를 짚었다는 불안감이 가시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다시 두통이 느껴졌다. 평소엔 숙취가 심하지 않은데,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서랍을 뒤져 두통약을 찾으려 했지만, 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은별이 방을 본 것이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선 청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훅 들이쳤다. 쌀쌀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웠지만 청소하기에는 그만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를 주워 봉투에 털어 넣는데, 뜻밖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외국인 여자친구에게 쓰다 만 편지 몇 장이 발견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연습용 편지였다. 수전증이 심해, 글씨가 깔끔하게 나오질 않아서 여러 번 고쳐 쓰곤 했었다. 버리려다 미뤄둔 것을 잊고 있었다.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펼쳐봤다. 


 돌이켜보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가 원해서 그랬다. 자의는 없었다. 연락에 성의를 보이라던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25


 우리는 한강을 거닐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걷던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이랑 걸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좋아요.”


 그 말에 속으로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응, 나도 그래.”



 다른 대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두려웠다. 진심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 모호한 관계를 지속하기 싫었다. 하지만 선뜻 끝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인간은 참 솔직해지기 어려운 존재다. 솔직하지 못한 말을 할 때 몸은 병들어간다. 난 병에 걸리기 싫었다. 대신 입으로 할 말을 대신하여, 편지를 쓰는 쪽을 택했다.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자 흥미는 반감됐다. 진실되지 않은 문장들을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 


 거부감으로 편지를 구기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완성한 편지였다. 하지만 다른 편지들처럼 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 인연도 편지처럼 어영부영 끝을 맺고 말았다.









26


 연이 죽고 나서, 연과 관련한 물품을 모두 버렸다. 엄마의 유품마저도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털어 넣었다. 옆에서 돕던 삼촌이 버린 물품 중 일부를 가져갔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무렵 자퇴했었다. 후에는 클럽을 전전하며 살았다. 잊고 싶은 기억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는지도.




 클럽에서 친해진 바텐더가 있었다. 그녀는 새벽 3시쯤 되면 내게 아인슈페너를 만들어 주었다. 클럽에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맛이 인상 깊었다. 아인슈페너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커피는 나와 닮아있었다.





 맛있는 아인슈페너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까 한다. 우선 클럽에서 실컷 술을 퍼마신다. 그리고 눈이 맞는 이성과 밤을 보낸다.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서로 애무하고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사랑 고백을 해 본다. 모든 게 끝나면 잠깐 밖으로 나가 식사도 한다. 해장으로 국밥 한 그릇을 나눠 먹는다. 


 뜨끈한 국물이 속을 달래주니 숙취가 가신다. 거기에 소주 한 병을 더 시킨다. 잔을 채우고, 서로의 잔을 때린다. 소주를 들이켜고, 목 긁는 소리를 낸 후, 그제야 이름을 물어본다. 물론 그 이름을 기억하진 않는다. 그렇게 다시 침대로 향한다. 뒤의 일을 반복한다.




 어느새 아침이 된다. 슬슬 달콤함과 쓰림이 공존하는 미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서로의 사랑은 처음에는 거짓으로 시작했다. 


 둘 중 하나 혹은 아무도 사랑의 감정이 없더라도, 아침 무렵에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쪽은 운명적 사랑을 간절히 바란다. 반대로 진실한 감정을 가진 쪽은 다르다. 그 사람은 잠깐의 편안함을 얻으려 남에게 행복을 각인시키는 행위를 반복한다. 


 상대는 행복을 각인받았지만, 불행이 동반되는 모순에 휩싸인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사랑을 부정한다. 남겨진 이는 버림받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실 저주에 가깝다. 하지만 저주를 내린 쪽도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자신에게 선고된 불행을 잠깐이나마 유예할 수 있으니. 이렇게 맛있는 아인슈페너가 한 잔 만들어진다.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면, 문득 죄책감이 사라진다. 다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전날보다 더 늙어 버린 내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응시한다. 










27


 아빠와의 기억은 얼마 없다. 그는 늘 조용했다. 아침이면 작은 가위를 가져와 거울 앞에서 한참을 다듬었는데, 딱히 단정하게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저분해 보였다. 책방에 출근하기 전에는 공책을 한 권 챙겼었는데, 검은색 공책이었다. 그가 퇴근하여 공책이 화장실 앞에 널브러져 있으면 몰래 다가가 공책을 넘겨보았다. 


 글씨체가 안 좋아서 읽을 수는 없었는데, 매일 새로운 페이지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느 날은 페이지 전체가 잉크가 진한 어떠한 펜으로 지워져 있기도 했다.




 그는 샤워가 끝나면 저녁 식사를 했다. 엄마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별다른 대답 없이 밥만 먹었다. 가끔 내 눈과 마주치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와 책방 청소를 갔었다. 문을 열자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 모든 선반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책방 안으로 들어서자 종이와 가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입자들이 희미한 햇 빛 속에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노란빛 전구는 어둑한 실내를 따스하게 밝혔지만, 구석구석은 여전히 그림자에 감춰져 있었다.



 왼쪽 벽면을 따라 늘어선 책장들은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난 책장에는 크기와 색깔이 각양각색인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어떤 책들은 시간의 흐름을 못 이기고 살짝 휘어져 있었고, 또 어떤 책들은 반듯했다.




 창가에는 흔들의자와 낮은 책상이 있었는데, 나중에 병원에서 엄마의 입을 빌려 듣기로 아빠와 자주 그 자리에 앉았었다고 한다. 그는 몸이 태생적으로 아팠고, 엄마도 이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이날 아빠처럼 말이 별로 없었다. 



 필요 없는 쓰레기를 한창 빼내고 있는데, 검은 공책이 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의 겉면에는 ‘d.p.’ 라는 글자가 보드마카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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