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2
한 영화의 OST가 귀에 들어왔다.
<Lost Stars>가 그 노래다.
2022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이었을 거다. 이 노래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는 가사에 파고들지 않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볼까 한다. 많이 어렸을 적 기억이다. 침대 하나가 들어가기에 작은 집이었다. 빌라의 2층이었는데 창문으로 매연이 올라오고, 창틀에는 검은 먼지가 쌓이곤 했다. 겨울이면 한기가 벽을 타고 들어왔다. 그래서 항상 이불을 싸매고 지냈다.
하루는 엄마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추위 때문에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엄마는 마루 바닥에 앉아 나를 무릎에 눕혔다. 그리고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서 읽어주셨다. 나는 당시에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지났음에도 그랬다. 그렇다고 소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겨울밤에 보일러가 돌고, 등이 따스해지며 잠이 솔솔 왔었다. 눈이 감기다가도 잠깐씩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할 때면 소설 속 내용이 상상됐다. 읽을 줄 몰라도 혼자 상상하며 피식거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사실 그 순간이 좋았던 건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집에는 엄마가 쓰던 노트북이 한 대가 있었다. 구형 노트북이라 게임을 하기엔 성능이 좋지 못했고, 엑셀 정도만 겨우 돌아갔던 걸로 기억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마의 무릎베개에 누운 채, 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날 이후, 심심할 때면 노트북으로 엄마가 읽어 주신 소설을 그 노트북으로 따라 써 보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창작보다는 필사에 가까웠다. 읽을 줄도 모르면서 글을 쓴다니, 썩 우스운 일이었다.
수십 년이 흐르고, 나는 제법 말을 읽고 쓸 정도는 되었다. 중간 과정이 많이 생략됐나, 매일 소설에 매진하는 어떤 꼬마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그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노트북은 외면된 지 오래였고 글쓰기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냥 친구들과 뛰어놀고, 흥미 없는 것에 금방 식어 버리는 철없는 소년만 오래도록 남아 있다.
다시 얘기를 마저하겠다. 어느 날이었다. 바보 같고 미련한 행동이 넘쳐났다. 비하적인 말투를 입에 달고 살았고, 어쩌면 그에 대한 업보를 치르고 있었다. 사랑은 뜻대로 안 돼 착잡한 시기였다. 군을 전역하면서 열심히 살기로 했건만, 다짐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매일 하루를 탕진하며 탁한 미래를 걱정했지만, 다음 날이면 몸을 알콜로 채워 넣고 있었다. TV를 틀면 좋은 뉴스는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절망이 서려 있는 계절이었다.
이 시기에 우연히 서점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 한 권이 눈에 보였다. 훈과 별이 좋아하는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였다. 나도 그들과 같은 책을 읽었다. 마침 노래 가사 한 소절이 계속 맴돌았다. <Lost stars> 가사의 일부분이다.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직역하면 이렇다.
‘사냥철이 다가오면 어린양들은 도망쳐요.’
그날 집에 돌아와 공책을 펼쳤다. 펜도 꺼냈다.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훈은 여전히 강남 근처에 빌라촌에 살고 있다. 술집이 많은 거리는 아니지만, 때로는 취객들이 말썽 피우는 곳이다. 대신 근처에 조용한 공원이 많다. 운치 있는 곳이다.
요즘은 점심 직전에 기상하고 스터디 카페로 출근한다고 한다. 연말이면 상대적으로 한가해져서 아침에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 덕에 수입은 조금 줄었지만, 글 쓸 시간이 늘어서 썩 나쁘지만은 않더랬다. 아르바이트 말고도 다른 수입이 생긴 것 같다.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한다. 슬슬 뱃살을 걱정할 시기라 그런 것 같다. 클럽은 가지 않는다. 안 간지 꽤 돼보였다.
요즘 돈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들판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을 전했다.
휴일이면, 시간을 내어 꽃집에서 흰 꽃, 몇 송이를 산다. 그리고 이천에 내려간다. 편지와 함께.
소린은 훈과 간간이 연락한다. 둘은 친한 밥 친구가 됐다. 소린은 졸업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사실 이 얘기를 들었을 땐, 이미 다음 날 비행기 표가 예약된 상태였다.
최근 들리는 말에, 그녀는 외국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고 한다. 친화력이 여전해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고 한다. 빨빨 거리며 치근덕대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소린이 새로 알게 된 친구 중 한 명의 SNS 계정에서 ‘함께 아는 친구’ 목록에 훈의 이름이 표시 됐다고 한다. 소린은 곧바로 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놀리는 듯한 메시지는 덤이었다. 훈은 소린이 자신을 놀릴 때 나오는 특유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메세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아직 소린의 다음 여행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은별은 여전히 인기가 많다. 모델 일을 넘어 영화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은 큰 역할은 아니지만, 만족하는 것 같다.
최근에 자신의 본명으로 된 sns 계정을 개설했다는 소식이다. 팬들과의 소통이 원활한데, 하루는 그녀의 sns 개인 방송 도중, 방에 놓인 책 한 권이 우연히 화면에 잡혔다. 팬들과 웃고 떠드는 방송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 책이 관심을 끌며 서점에서 품절대란이 일어났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훈과 은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 술자리 이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혹은 가끔 은별이 한국에 들를 때 만나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훈과 별 둘 다 아직 연인이 없다.
아, 이건 책이 유명해지고 나서의 일이다.
별은 한 배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대받았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자, 진행자 아민이 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별 씨의 개인 방송에서 유명해진 소설이 있는데요, 이 소설을 어쩌다가 처음 읽게 되셨나요?”
“아, 그건 따로 사서 읽은 건 아니에요. 누가 보내줬거든요.”
“소설 내용은 어떤가요? 재밌었나요?”
아진의 물음에 은별은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답했다.
“네, 기대한 대로였어요.”
은별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얘기하면, 그들은 생각보다 절망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바다 한가운데 배가 떠 있는데, 배 바닥에 구멍이 잔뜩 나 있다. 구멍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는 갓난아기처럼 무력하다. 나도 그 배에 타있다.
어렸을 적 봤던 영화에서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이 허둥지둥 날뛰는 모습이 생각난다. 그들 옆에 이들을 위해 연주하는 악단이 있다. 힘든 상황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들을 몇몇은 배에서 살아남아 기억한다. 인상 깊게 본 장면들 중 하나다.
소설 쓰기에 이유는 다른 게 없다. 보며 느낀 감정을 그대로 글로 옮기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가장 크다. 다들 같은 생각으로 글을 쓸 거다, 아무튼 특별하지 않다.
글은 블루투스 키보드를 스마트폰에 연결하여 썼었다. 펜으로 쓰기도 하지만 수전증이 심해서 오래 쓰지는 못한다. 지금은 중고 노트북을 한 대 구해서 쓰고 있다.
알바가 끝나면 카페로 향한다. 집에서도 쓰지만, 주로 카페에서 많이 쓴다. 스터디 카페도 간 적 있지만, 너무 조용해서 나랑은 맞지 않았다. 자주 가는 카페는 집중이 잘돼서 좋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가 보여 케이크를 사곤 한다. 마냥 눈치 때문에 산다 하면 좀 그래서, 내 글을 돈 주고 산다는 느낌으로 돈을 낸다. 케이크는 덤이니 나쁘지 않다.
주변에서도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시선과 달리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집중력이 좋지 못하고, 약간의 난독증이 있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긴 호흡의 글은 힘겹다. 좋아하는 책이 몇 권 있지만, 여러 번 읽고 나서야 겨우 내용을 이해한다. 이런 책들 또한 읽음을 시도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앞선 이유로 소설보다는 직관적인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만화카페도 자주 간다. 만화를 읽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출출할 때 아이스티에 라면 한 그릇 시키면 배까지 부르니 최고다. 나중에 만화도 그려보고 싶다.
게임을 좋아한다. 게임은 글을 읽지 못하던 시절부터 나와 함께했다. 물론 지금도 몹시 좋아한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세상에 빠지는 일이다. 이런 세상에 빠지는 건 늘 만족스럽다.
작은 소망이 있다. 먼 미래, 그러니까 손마디에 주름이 잡힐 때쯤을 말한다. 그때 세계관을 만들고 싶다.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 될 것 같지만, 주름이야 얼마든 피어올라도 괜찮다.
마침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누군가 잠시 놀러 와 즐기면 그걸로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Music title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유독 글이 막히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벌떡 일어나 어깨를 양옆으로 펼쳐 흔들어 스트레칭한다. 때로는 허리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책상에 앉아보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산책을 나간다. 양말 신기가 여간 귀찮아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산책에 곁들일 음악은 류이치(坂本龍一)의 음악이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하나 산다. 글을 쓰고 나면 마실 생각이다. 이렇게 작은 목표라도 세우면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작은 희망 사항이다. 하지만 돌아와도 상황은 아까와 마찬가지다. 여전히 글은 뚫릴 생각이 없다. 동경하는 누군가는 매일 아침, 앉은자리에서 4천 자가량의 글은 거뜬히 쓴다고 하는데, 아직 나에게는 그 정도의 버릇이 없다. 글쓰기를 버거워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마 열정이 없는 거겠지.
잠시 웹페이지를 켜고 딴짓을 시작한다. 잠깐 즐기다, 정신 차리면 1-2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다. 살짝의 자괴감이 피어난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법한 그런 상황일 거다. 이제는 정말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책상에 붙여 본다.
1분, 2분, 3분… 한 5분 정도 지났으려나,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를 메운다. 생각의 근원은 대개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그것은 시절 기억, 순수했던 기억이다. 괜히 발걸음을 바라보며 걷던 순간, 그날의 날씨, 느껴지는 습도, 그때의 마음, 그대의 온기, 불협화음에 가까운 움직임들, 이 모든 기억이 머리를 스쳐 간다.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녀에 대해 떠올릴 거고, 그녀라면 사랑을 생각하려나, 어느 쪽이든 기억은 그렇게 우리를 물들인다.
갑자기 곳곳이 간지럽다. 다리털 마디 사이사이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팔을 구부려 몸을 긁적여 본다. 답답함은 개선되지 않는다. 딱히 개선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잠시 생각한다, 자신과의 타협에 다다르는 생각이다. 협상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에라,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잘하자. 오늘은 깡통 찼다.” 이렇게 혼잣말하며 침대로 몸을 던진다. 얼굴의 방향은 하늘을 본 채로, 그러면 바람이 일며 이불에 쌓인 먼지가 천장으로 붕 뜨는 게 보인다. 약간 걸쳐진 커튼 사이로 햇빛이 보인다. 먼지가 뜨며 빛에 쬐어졌는데, 일렁이다 사라진다. 침대의 바로 옆에 벽이 있다. 벽 너머로 적당한 찬기가 느껴지며 슬슬 추워진다. 짧은 반팔을 입고 있어서 그렇다. 팔을 비비고 싶은 충동에 양팔을 구부려 마찰로 온기를 불어넣는다. 팔이 따뜻해진다. 단 온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불을 끌어안으면 분명 따뜻할 텐데, 이불을 덮으면 눈을 감겠지. 눈을 감으면 잠들 테고, 자면 악몽을 꿀 거다. 다행히 아까까지 글을 썼기에 머리는 말똥 하다. 머리에 잡다한 생각을 무작위로 채워 넣어 잠을 쫓아본다.
…아니다, 다시 잠겨보자. 깊은 생각으로. 문득 어떤 소설에 대해 떠올린다. 이 ‘문득’은 과거에도 있었다. 오늘처럼 춥고, 늦은 새벽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에 눈이 떠졌다. 다만 평소와 다른 새벽이었다. 은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별도 깨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떨고 있었다.
“별아, 왜 그래. 추워?”
내가 물었다. 은별은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쁜 꿈을 꿨어. 매우 끔찍한 꿈이었어.”
은별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고, 이불을 끌고 와 몸을 덮어줬다. 그녀가 다시 잠에 빠질 수 있도록,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Ne t'inquiète pas.” (*느텐키파)
내가 말했다. 너무나 작게 말해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뭐라고?”
은별이 되물었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이 알려 준 말이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런 뜻이야.”
은별은 눈이 동그라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다시 말했다.
“Ne t'inquiète pas, Ne t'inquiète pas, Ne t'inquiète pas.”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야!”
은별은 가팔라진 숨을 멈추고, 작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라니 바보 같잖아.”
은별은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잊지 않을게.”
은별의 말을 듣고, 나도 말했다.
“…… 절대 잊으면 안 돼.”
“너무 진지한데?”
내 말을 듣고 은별은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다.
은별의 말을 끝으로 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스탠드 불을 켜고, 펜을 꺼냈다. 눈을 흘깃 돌리자 나를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은별의 모습이 보였다. 난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미묘한 긴장감에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은별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맞췄다. 옅은 ‘쪽’ 소리가 방에 잠시 울리고 사라졌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동시에 그랬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훈아, 네 글은 언제쯤 완성돼?”
은별은 다시 침대 쪽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동동 거리며, 부드럽게 물었다.
“너, 그런 말 처음 하는 것 같다?”
내 목소리에는 은근한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이제 궁금해질 만도 하잖아. 지금까지 써 온 거라도 보고 싶어.”
은별이 말했다.
“하긴 오래되긴 했지… 글쎄다, 완성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어.”
난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니다, 보여 주지마!”
은별이 재빨리 말했다.
“갑자기?”
“아직 완성된 게 아니잖아. 삭제될지도 모를 문장을 보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별아, 날 좋아해?”
“응.”
“왜?”
“특별한 이유는 없어. 동경하게 된 마음이 커진 걸지도.”
“정말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시작되기도 하잖아.”
은별은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미소도 함께.
바로 이때다,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설이 떠올랐을 때가.
<여울의 여명>에서 프레스턴이 내뱉는 마지막 독백이었다.
[그 입맞춤은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듯, 혹은 영원을 약속하는 듯했다.
[우리 모두 수많은 이야기 속을 여행한다. 간혹 길을 잃을 수 있고, 막상 도착하니 원하던 곳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우연 이상으로 마주칠 수 있다는 얘기다. 절망할 필요도 없고, 사랑 이야기를 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서로를 향한 솔직한 끌림은 실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랑뿐이다. 남은 이는 사랑하면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은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