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2
사랑이란, 두 영혼이 만나 하나가 되는 순간을 뜻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문득 위를 돌아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버린 시절과 마주하면 아픔이 남아 있다. 후회이자, 다행스러운 기억. 잊혀진 기억이었는데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한마디부터 떠올릴까…
“겉치레에 빠져 사랑을 놓쳐 버렸어.”
은별이 짧게 말했다.
어두운 호텔 방이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전자 담배를 피우는 은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연기가 그녀의 긴 생머리와 피부를 감싸 안고,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둥근 젖가슴에 내려앉았다. 우린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도 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가벼운 침묵 속에서 내 눈은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마음 한편에 품어둔 여자였다. 내게는 은별이었다. 은별과 처음 마주쳤을 때, 언젠가 그녀와 사랑에 빠질 것 같았다. 막연한 바람 같은 건 아니었다. 느낌이었다. 그저 느낌. 사랑을 할 것 같은 느낌. 몸을 섞고, 서로 애무하고, 단순히 육체적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그런 관계. 언젠가가 될 것 같았다. 늦은 새벽은 적당히 고요했다. 커다란 호텔 창문 너머로는 간혹 자동차의 경적음이 들려왔고, 긴 도시에 깔린 수많은 조명이 보였다.
은별은 한 손을 침대에 고정시켜 몸을 지탱하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녀의 생머리가 턱선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졌다. 순간 은별의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추측이었다. 은별은 그 상태로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전자 담배를 가볍게 빨았다.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그녀의 입과 코 사이로 빠져나왔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led가 나오는 구멍에서 붉은빛이 깜빡였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때의 정적에서 난 은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방금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예전에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못했던 그 질문이다. 하지만 이때도 쉽사리 입이 떼지지 않았다. 짧은 생각이 길어져 긴 침묵이 은별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덜컹’, ‘덜컹’, ‘덜컹.’
적당히 오래된 에어컨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났다.
“겉치레에 빠져 사랑을 놓쳐 버렸어.”
은별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이야.”
은별이 말했다. 난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의 머리맡에 앉아, 은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예아는 고개를 돌려 창밖 어딘가를 응시했다.
“훈아, 나 좋아하지?”
은별이 말했다.
심장이 잠깐 망설였다. 난 답했다.
“... 아니.”
속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은별은 내 대답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은별이 말했다.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미소가 보였다. 맑고… 순수한 미소였다. 우리 모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순수함이 담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여전히 이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소린은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비웠다. “제 얘기만 늘어놓아서 죄송해요. 다음에는 꼭 훈 씨 얘기해 주세요.” 소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일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다고 했다. 소린이 나가자, 나도 가게를 나섰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은별과 약속한 곳으로 향했다. 어제 만났던 바였다. 어제의 그 장소였다.
바에는 은별이 먼저와 있었다. 탁자에는 은별이 미리 시켜둔 베일리스와 모히토가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얼음이 모두 녹아 있었고, 베일리스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주 접시에는 먹다 남은 코코넛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여전히 바 중앙의 모니터에는 오래된 영화가 틀어지고 있었다. 플레이리스트도 어제와 같았다. 그리고 난 적당히 취해 있었다.
“훈아,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누가 한 말이 생각나서.”
“어떤 말?”
“별아, 나 머리가 지끈거려.”
내가 말했다.
“많이 아파?”
“꽤나. 속도 울렁거려.”
“그럼 좀 걷자. 바람 좀 쐬면 괜찮을 거야.”
은별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오다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지만, 은별이 재빨리 잡아줬다. 건물을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뒤로는 시끄러운 클럽 거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길가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삐끼도 보였다. 블록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녀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건물 벽에 기대어 구토하는 사람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강남 거리를 벗어나자, 옷 가게들이 마감하는 게 보였다. 큰 건물도 여럿 보였는데, 안에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조명만 반짝이니 운치 있었다.
30여분쯤 걸었을까, 근처에 작은 공원과 손님 없는 편의점이 보였다. 익숙한 붉은 벽돌 외관의 빌라가 눈에 들어왔다. 층수가 낮아 창문 너머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 집이었다. 습관처럼 불을 켜 놓고 나오곤 했다. 그럼 밖에서 창가에 화분이 비춰 보였다.
찬 바람이 불었다. 양손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마찰로 팔이 따뜻해졌다. 옆에는 은별이 날 부축하고 있었다.
“너는 언제 돌아가?”
내가 물었다.
“미국 말하는 거지?”
“응.”
“내일이야.”
“몇 시 비행기인데?”
“아침 아홉 시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유독 조용한 밤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오면서 청소를 해서 집 안은 깨끗했다. 은별은 목이 탔는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잠시 냉장고 안을 살피더니 캔맥주를 골랐다. 나도 같은 걸 골랐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책상에 앉았다. 책꽂이에서 공책 하나를 꺼내 펼쳤다. 공책에는 펜이 한 자루 끼워져 있었다. 은별은 책상 옆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아 티비를 틀었다. 영화 채널이 켜졌다.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So let it out and let it in hey Jude begin
You’re waiting for someone to perform with
늦은 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까. 고민에 잠긴 채 펜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 하지만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은 엉키고 엉켜, 한 글자 적어 내기 조차 버거웠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은별은 이미 캔맥주를 다 마셨는지, 고개를 꺾은 채 맥주 캔을 허공에 탈탈 털고 있었다. 캔 안에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에 난 뒤돌아봤다. 은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무언가가 우스운지 함께 피식 웃었다.
행복은 좇는다는 건 불행과도 마주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내가 아는 한 꼬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노력하기보다는 떠올리고 있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간절히 바란다고 해야 하나.
연이 떠난 후로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먹칠된 도화지가 떠올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자다가도 불현듯 눈이 떠졌다. 그러면 새벽이 날 맞았다. 지금도 먹칠된 시야가 펼쳐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눈을 감아도, 도화지도, 먹칠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은별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공책의 빈 페이지와 은별은 번갈아 봤다. 여전히 은별은 나를 보고 있었다.
“있잖아. 우리 독립 영화관에서 영화 본 거 기억나?”
내가 운을 뗐다. 정면을 보다 서서히 은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은별의 눈이 보였다.
“당연하지.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네.”
“내용도 기억해?”
“물론이야.”
은별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소설 <여울의 여명>은 독립 영화로 제작됐었다. 처음 영화 제작 소식이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명작의 영상화는 늘 환영받는 일이니까. 등장인물 중 ‘제시카’의 역에 유명 배우가 낙점되었다. 사람들은 좋아했다. 사실 그들이 기대하는 건 제시카가 아닌 주인공 ‘프레스턴’의 역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순식간에 논란으로 바뀌었다. 프레스턴 배역에 여자 아이돌 ‘아민’이 캐스팅된 것이다. 아민은 연기 쪽에서 인지도가 아예 없었다. 사실 아이돌 캐스팅보다 더 큰 문제는 프레스턴이 작중에서 남자라는 사실이다. 여자가 남자 배역을 맡다니, 영화감독이 유명 작품을 이용해 투자를 받고 개인적 사심을 채운다는 말이 심심찮게 터져 나왔었다. 감독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논란 속에 영화는 개봉됐다.
영화의 첫 장면은 머리를 짧게 친 ‘아민’, 아니 ‘프레스턴’이 베일리스를 마시며 시작한다. 프레스턴은 연인의 죽음으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술에 절여져 살았고, 어쩌면 술병으로 죽는 걸 원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오랜 친구가 프레스턴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제시카였다. 둘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나눈다. 프레스턴은 제시카와의 대화 속에서 그녀에게 빠져든다. 제시카도 같은 감정이었다. 친구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마음은 같았다. 이러한 마음은 동성의 낯선 사랑과 겹쳐 보인다.
수십 년 전 영화라 촌스러운 면이 많다. 잘 만든 영화라고도 볼 수 없었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 여전히 오르내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이제 펼쳐진다.
바닷가에서 듬성듬성한 조명 아래로 두 배우의 얼굴이 비친다. 한 명은 여자고, 다른 한 명도 여자다. 한 명의 이름은 프레스턴이고, 다른 한 명은 제시카다. 연기한 배우 둘 모두 동성이지만, 작중 둘은 분명 이성이고 서로 사랑한다.
얼굴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바다 바람이 불며 두 여인의 짧고,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얼굴 윤곽과 어우러진다. 시선의 맞물림이 이뤄지고, 슬며시 카메라는 줌인된다. 주변이 흐릿해지고 이제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숨이 멎는다. 그리고 눈 감은 두 입술이 마주 닿는 순간, 고요해진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그 입맞춤은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듯, 혹은 영원을 약속하는 듯했다.]
…
그 후 프레스턴의 마지막 독백이 나오며 소설은 끝난다.
은별은 텅 빈 맥주 캔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앞으로 못 볼지도 몰라.”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은별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답했다.
숨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창문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찬 날씨와 술기운에 코끝이 시려워 살 내음은 맡지 못했다. 대신 둘을 잇는 무언가는 또렷하게 느껴졌다. 잠시 별이 꺼지듯 영혼의 온기가 느껴졌다.
은별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살며시 품에 안았다. 안정된, 잔잔한 날숨소리만이 창틈으로 새어 나왔다.
잠에서 깨어났다.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덮고 있었다. 눈앞이 일렁였다. 눈을 비비고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별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는 공책에 무언가 적혀 있었다. 선명한 글씨였다. ‘택시 타고 갈게.’ 내 글씨체가 아니었다.
커튼을 다시 치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두통은 아직 잔잔하게 깔려있었다. 아무래도 다시 잠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다시 일어나 커튼을 거뒀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살짝 들렸다 나갔다. 햇빛도 머물러 있었다.
머리의 맑아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