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2
은별과 술을 마신 다음 날, 카페로 출근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스터디 카페였다. 출근길에 거리를 둘러봤지만, 어제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는 듯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 술에 덜 깬 채 길가에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띌 뿐이었다.
카페 일은 간단하다. 주문이 들어오면 커피를 내리고, 가끔 쿠키나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것이 전부였다. 손님들은 대부분 스터디 카페에 공부하거나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포장을 해가는 사람도 있었다. 쿠키는 매장에서 직접 만들지 않고, 같은 건물을 쓰는 빵집에서 대량으로 사 오면 됐다. 빵집이 있어서인지 복도에는 언제나 버터향이 진동했다. 이렇게 별다른 일 없이 오후 6시가 되면, 팔고 남은 쿠키는 내 몫이었다. (손님들도 따뜻한 쿠키를 좋아해서, 가끔 대량으로 사 올 때면 금세 동날 때가 많았다.)
평소 단조로운 업무에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점장님은 그렇지 않은 눈치였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여기 오는 새끼들, 싹 다 IQ 검사부터 하고 받아야 한다니까.”
아침부터 점장님은 화장실 변기통에 토하고 도망친 사람을 잡아내기 위해 안달 나있었다. 그는 좁은 매장 안을 씩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기 구석 자리에 머리 헝클어진 놈 보이지? 내가 볼 땐 저놈이 범인이야. 어제도 술 퍼마시다 공부한다고 여기 와서 뻗어 자더니, 오늘 또 그러고 있지. 여긴 모텔이 아니라고.”
내가 점장님의 막말에 웃음 터트리자, 그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이놈들 사는 게 짜증 나서 그래.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은 꿈 꾸는데, 비교되니까 의욕이 떨어지고… 그러니까 술이나 퍼마시는 거지.”
그의 표정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지만, 말에는 묘한 연민이 섞여 있었다. 언뜻 보면 점장님은 인간 혐오로 가득 찬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나를 포함해 다른 근무자들에게 잘 대해주었다. 출퇴근하며 마주친 타 시간대 근무자들이 아직도 그만두지 않고 장기간 일하는 게 그 증거였다.
점심이 되면 카페는 텅 빈다. 그러다 다시 오후 2시쯤 되면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면서 가득 찬다. 이때가 나의 점심시간이다. 점장님에게 가게를 맡기고, 건물 맞은편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때우기 위해 들어갔다. 이 시간에 가면 사람이 적어서 좋았다.
자리를 잡고 햄버거를 먹으려는데, 가게에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한 번쯤 마주친 얼굴이었다. 상대방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아보는 눈치였다. 키가 작고 흰색 롱코트에 짧은 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어젯밤에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여자가 먼저 다가왔다.
“어제 그분 맞으시죠?”
여자가 말했다.
“네네, 그 성함이…”
여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소린이요, 소린. 벌써 까먹으셨나요?”
“아뇨… 네 사실 까먹었어요. 죄송해요.”
적당한 핑계를 대려고 했는데, 떠오르지 않아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내 말에 소린은 웃었다.
“괜찮아요, 죄송할 것까지야… 잠시만 기다려요. 먹을 거 시키고 올게요.”
‘왜 굳이 저랑 먹으려는 거죠?’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소린은 이미 들고 온 가방을 멋대로 내 옆자리에 던져두고, 햄버거를 주문하러 가 버렸다. 순간 목이 타서 콜라를 빨았다. 다 마셨는지 공기 빠는 소리만 들렸다.
버거를 받은 소린은 내 앞에 앉았다. 트레이에 케첩을 뿌리고, 감자튀김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제 왜 답장 안 했어요?”
“취해서 까먹었나 봐요.”
“거짓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생각보다 거짓말을 못 하시네요. 어제 말하는 거 보고 칼 같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소린이 감자튀김을 씹으며 말했다.
어제 일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술에 취해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했다.
“너무 늦게 물어보는 건데, 이름은 뭐예요?”
“저… 백 택이요.”
거짓말을 못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최대한 빨리 답하려고 노력했으나, 습관은 무섭다. 이번 역시 다른 이름을 말한 게 걸리면 오늘부로 거짓말은 그만둬야겠다.
“택 씨는 이 시간에만 식사하세요? 그렇다면 생각보다 늦게 드시네요.”
“꼭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와야 사람이 없거든요.”
소린은 내 트레이에 올려진 남은 감자튀김을 슬쩍 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손을 휘적이며 가져가라는 말을 하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감자튀김을 가져가고 종이봉투를 찢어 자기 트레이에 쏟았다. 그 후로 한 번에 두 개씩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케첩에 찍어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소린 씨는 왜 이렇게 늦게 식사하시죠?”
“공부하다가 배고파서 왔어요. 근처 스터디 카페에서요. 음… 정확히 말하면 자다가 점심 타이밍을 놓쳤어요.”
소린이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근방에 스터디 카페는 내가 일하는 곳밖에 없었다.
“스터디 카페요? 여기 햄버거 가게 앞 쪽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소린이 끄덕였다.
“저도 저기 다녀요, 카페에서 일하죠.”
“그런가요. 그런데 왜 오늘 못 본 것 같죠.”
“글쎄요.”
스터디 카페라고 해서 모두가 열심히인 건 아니었다. 지금 들어가도 배가 불러 식곤증에 자는 사람이 몇 명 있을 터였다. 또 몇 명은 배가 꺼질 때까지 근처를 돌다 들어올 것이고, 그 후 다시 잠이 쏟아져 잘 게 뻔했다. 그녀 또한 내가 생각한 부류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다 먹은 햄버거 봉투를 구겼다. 난 진즉 다 먹은 상태였다. 이제 담배만 한 대 피고 들어가면 됐다. 그녀도 따라 나와 담배를 꺼냈다.
“근데 옷이 어제랑 똑같네요.”
내가 물었다.
“막차 시간 지나서 까지 놀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집 가서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못 일어나면 공부를 못하니까…”
소린은 말을 흐리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라이터를 빌려달라는 뜻이었다. 난 바람을 막아주고 불을 붙여주며 말을 이었다.
“대학을 다니나 봐요?”
“네 맞아요, 슬슬 시험이라.”
소린이 ‘후’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햇빛이 있으니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어제와 달리 꽤 어른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시험 끝나면 시집을 읽을까 해요.”
소린이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소린의 목에 새겨진 작은 타투가 보였다. 무슨 레터링이 박혀 있었는데, 궁금했지만 참았다.
“의외네요. 시라니.”
“요새 시 읽는 사람이 드물긴 해요.”
“어떤 시를 읽나요?”
내가 물었다.
“향수요.”
순간 멈칫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좋아한 시네요.”
“그게 누군데요.”
“... 삼촌이요.”
“삼촌 하고 친하신가 봐요?”
“꽤 친했죠, 어머니 돌아가시고 연락 안 한 지 꽤 됐지만.”
“... 거기까지는 궁금하지 않았어요.”
소린이 바른 웃음과 함께 담뱃재를 털어냈다. 나 역시 담배를 비벼 껐다. 연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택 씨는 시 같은 거 안 읽어요?”
“거의 안 읽는 편이에요. 삼촌 덕분에 좀 읽었죠”
왠지 이 자리가 어색해져,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음, 그나저나 시험공부 열심히 하세요. 같이 응원하고 있을게요.”
“고마워요.”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린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까지 대화 몇 마디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소린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택 씨, 이따가 뭐 하세요?”
“딱히 뭐 없어요.”
“오해하지는 마시고, 인생 얘기나 할래요?”
스터디 카페로 들어가면서 소린이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두 번째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은별과 밤에 만나기로 했지만, 늦게 간다고 문자를 남겼다. 은별도 사정이 생겼는지 상관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잘 됐다고 답했다.
카페에 들어서고부터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카운터로 돌아가 점장님을 도우며 커피 기계를 만졌고, 소린은 자리에 앉아 공부 자료를 꺼내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만 맞출 뿐이었다.
6시, 퇴근 시간이 되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소린은 책가방에 물건들을 쑤셔 넣었고, 나는 점장님께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먼저 건물을 나간 소린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피우지 않고, 건물을 나오자마자 방향을 꺾었다. 자연스레 소린도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옆으로 딱 붙어 걸었다. 술집으로 가는 길에 카페에서 팔고 남은 쿠키를 나눠 먹었다. 쿠키 부스러기가 옷에 흩어지며 떨어지자, 괜한 웃음이 연출되기도 했다.
원래 목적지는 소린과 처음 마주쳤던 곳으로 바로 가려 했다. 하지만 소린이 맥주가 먹고 싶다고 하여 근처 골목 이자카야로 방향을 틀었다. 들어가자마자 치킨과 생맥주를 한 잔씩 시켰다.
잡담을 나누던 중 소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택 씨, 글 쓰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 놀라 되물었다.
“카페 카운터에서 맨날 무언가를 적고 계셨잖아요.”
“공부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공부나 시험을 준비하는 거였다면… 계속 적어 내려갔겠죠, 펜을 멈추지 않고. 하지만 중간중간 멈추며 생각하시던데요. 그래서 공부가 아닐 거로 생각했어요.”
소린의 말이 맞았다. 더 써 내려가지 못할 뿐이었다. 글을 마치 잠깐의 취미처럼 대했다.
“저를 알고 계셨네요. 처음부터.”
“몇 년 전에도 클럽에서 마주쳤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반가워서, 아는 척했던 거였어요.”
소린이 건물 뒤쪽으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 방향은 클럽이 있는 방향이었다.
“혹시… 저희 아는 사이였나요?”
“아뇨,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요. 택 씨 인상이 좀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소린은 내가 심각해하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딸이 모르는 사람한테 아는 척하고 다니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괜찮아요, 두 분 다 안 계시거든요.”
“아… 미안해요, 그런 줄 몰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문득 눈물이 나올 단계는 지났거든요.”
소린은 실제로 마음이 여유로운 것 같았다. 때로는 외롭지만, 참을 만하다고 했다. 그녀는 광고학을 전공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역사 교사를 꿈꿨지만,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자기는 연금을 못 받을 것 같아서 접었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광고학이 끌렸다고 했다. 얘기하는 내내 광고 그래픽 작업을 할 때가 가장 재밌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만 간단한 카피라이팅 문장을 쓸 때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글 쓰는 거, 완성된 건 있나요?”
소린이 물었다.
“몇 년째 같은 것만 붙들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만난 지 24시간도 안 된 사이지만, 우리는 별 얘기를 다 꺼냈다. 하지만 차마 전에 만나던 사람이 죽은 이후 더는 글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고 말하기 싫었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흥미를 잃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 말도 사실이니까.
첫 번째 생맥주를 비웠다. “소맥으로 갈까요?”, 소린은 끄덕였다. 맥주를 리필하면서 소주도 시켰다.
난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 살았다고 말했다. 소린은 고향이 제주도라고 했다.
“타지 생활이 힘들거나 하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전혀요, 전 서울이 좋아요.”
“갑자기 그리울 때조차 없나요?”
“그리워 봤자,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가는걸요.”
“하지만 물리적 거리가 있잖아요.”
소린은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딴소리를 하였다.
“근데 제가 아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뭔데요?”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말을 처음 배운대요.”
“그런데요?”
치킨을 베어 물고, 소맥 잔을 마시며 말했다.
“그다음에 배우는 말이 뭔지 아세요?”
난 대답하지 않고, 치킨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시리야.’ 래요.”
소린은 자기가 말하고 피식 웃었다. 난 재미가 없어서 웃지 않았다. 하지만 소린의 웃음을 보니 덩달아 웃음이 샜다. 굳이 말하면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자기 얘기에 잘 웃는 편인가 봐요.”
“그런 것 같아요.”
소린은 여전히 피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요점이 뭔가요?”
내가 물었다.
“애들은 사실 엄마가 필요 없는 거예요. 굳이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어차피 알아서 잘 크거든요.”
소린도 소맥을 들이키며 말했다.
“소린 씨는 나중에 자식이 두 발로 걷기만 해도 칭찬하시겠어요.”
“누구나 그런 칭찬을 듣던 시절이 있었죠.”
“본인 얘기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서울 쪽 대학에 합격하면서 부모님께 서울로 간다고 말했죠. 그러자 부모님이 이렇게 말했어요, 서울로 갈 거면 주말마다 제주도로 내려오라고.”
난 말 마디마디마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소맥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매주 제주도로 돌아갔었어요. 그러다 첫 번째 방학이 시작되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비치된 잡지를 아무거나 뽑아 읽었죠. 와인 잡지였나 그랬을 거예요. 잡지에서 말하길 나파밸리의 포도 농장의 와인이 맛있대요. 그리고 그곳에 포토밭의 들판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하대요.”
“아, 나파밸리. 저도 누군가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가 맞장구쳤다.
“와인이랑 들판을 좋아하시나 봐요.”
소린이 말했다.
“아뇨. 들판은 모르겠는데, 와인은 한 번도 안 마셔봤어요. 막걸리나 보드카는 조금 좋아하는 데, 나중에는 와인도 마셔보겠죠?”
막걸리라는 말에 소린이 옅게 웃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 대화에서 시리가 중요한가요, 와인이 중요한가요. 그것도 아니면 사진?”
“다 중요해요!”
소린이 강조하며 외쳤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반복하자면, 주말에 공항이었어요. 그날 심심풀이로 잡지를 보았죠. 그리고 들판 사진을 보고… 잠깐 생각하다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서 나파밸리로 갔어요. 제주도로 가지 않고요.”
“갑자기요?”
“네. 갑자기요.”
“어땠나요? 아 와인 말고, 들판이요.”
내가 정정하며 물었다.
“실망이 컸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여름이라 포도 농사를 짓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들판이 울퉁불퉁했거든요.”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음… 이런 얘기해 보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천천히 하세요. 선약이 있기는 한데, 시간을 미뤄뒀거든요.”
“어제 바 창문에서 봤던 그분인가요?”
소린은 은별이 손 흔드는 모습을 흉내 내며 말했다.
“네, 맞아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얼른 가 봐야 하는 거 아녜요?”
“따로 연락 없는 걸 보니, 이쪽도 일이 길어지나 봐요. 그리고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사이거든요.”
“다행이네요.”
소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도 탔고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나파밸리로 갔어요. 부모님 말도 안 듣고요. 제멋대로 한 거죠. 막상 일을 저질렀는데, 실망했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시기를 잘못 잡은 탓이었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두 분이 같이 뱃일을 하셨는데, 파도에 휩쓸리셨대요. 힘들었는데… 그래도 저는 잘 살고 있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죠?”
“택 씨라고 하셨죠. 택 씨는 자기 얘기를 할 때 비는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을 채워 보세요. 솔직한 자신과 마주하는 거죠.”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린은 내가 따로 말이 없자 조용히 소맥을 들이켰다. 눈은 나를 보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난 다시 말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소린은 다시 말을 이었다.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에 갈 곳이 없어진 적이 있어요. 어제처럼요. 차는 끊기고, 모텔비도 없어서 사실상 길바닥에 방치됐었죠. 길을 걷다가 근처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어요. 평소 아이들이 많은 공원인데, 그 시간이면 아무도 없어서 노숙하기 좋았어요. 가로등 불빛만 깜박이더라고요. 한창 앉아서 졸고 있는데, 갑자기 찬 바람이 불었어요. 추위 때문에 팔이 시렸어요. 그래서 양손으로 팔을 쓸어내렸죠. 손바닥 마찰로 팔이 따뜻해졌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사소한 따뜻함에 행복을 느꼈어요. 혼자 멋대로 여행을 떠나 부모님을 임종도 못 지켰으면서, 팔의 온기로 행복해졌어요… 아마도 저를 붙잡던 무언가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았어요.”
소린이 말을 끝마쳤다.
“사실… 제 이름은 택이 아니라, 훈이예요. 백 훈.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졌어요.”
“조금 뜬금없긴 하네요.”
“죄송해요.”
소린은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 이후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훈 씨는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 꿈같은 거요.”
나는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