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혈=유산?
미디어를 통해 그려지는 임신과 출산의 모습은 정말 단순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랜 기간 그런 모습이 임신을 묘사하는 그럴싸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임신 5주. 적은 양의 출혈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3년 1월 1일, 새해였다. 아직은 이른 시기이기에 산부인과를 가지도 않은 때였다. 새해를 맞아 이스탄불을 떠나 옆나라 그리스로 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병원에 가볼 형편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임신 중 [출혈]은 [유산]을 뜻하는 증상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보통 TV나 영화 같은 매체에서 다루는 유산의 모습을 떠올리면 갑작스럽게 배를 부여잡는 여성의 모습과 잔인하게 흘러내리는 짙은 피의 이미지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놀랄 수준의 양은 아니지만 피가 비치는 상황은 두려웠다. 당연히 지난 유산 경험을 떠올랐고 어쩌면 이번 임신 역시 지난번과 같은 수순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첫 출혈 확인 이후 내 몸에서는 별다른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쏟아질듯한 하혈이나 통증도 없었다. 살짝 비쳤던 출혈도 멈췄다. 아직 내 몸에는 태아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징후도 없는 상태였다. 이 임신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새해임에도 아직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는 낯선 그리스 호텔에서, 나와 남편은 시무룩하게 마주 앉아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차 뒷좌석에 누워 최대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우리는 계획보다 조금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아기의 존재만 파악할 수 있어도 다행이라 생각했던 우리 부부는 아기 심장 소리까지 듣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우려와 달리 아기는 자궁 한 구석에 자기 자리를 잘 마련해두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안심하고 다음 진료 예약을 잡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뱃속에 아이가 찾아왔고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도 했다. 지난 경험 탓에 주변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고, 나와 남편은 우리 둘의 미래에 다시 아이를 데려다 두고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뜻하지 않은 심각한 출혈이 시작된 건 그렇게 아이의 존재를 현실로 끌고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화장실을 나서려던 내 눈에 보인 건 무섭도록 위협적인 붉은색의 피였다. 양은 상당했다. 나는 옆방에 있는 남편을 향해 소리쳤고 남편은 나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와 남편은 하얗게 질려 아무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15분 정도 걸려 병원에 도착해 곧바로 진료 의자에 올라 초음파로 자궁의 상태를 확인했다. 병원으로 가는 사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는 잠시 멎었지만 출혈의 징후는 명확했다. 초음파로 본 아이의 심장은 쿠앙쿠왕 천진난만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무사하다는 신호음이었다.
“아직은 너무 이른 주수라 당장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집으로 돌아가세요”
의사는 덧붙였다.
“유산으로 진행될 수도, 이대로 임신이 잘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반반이에요”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저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싶었지만, 아직 ‘출혈’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사실인지라 무언가 의학적인 치료 행위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터덜터덜 다시 차에 올라탄 순간 아래 속옷으로 울컥하고 무언가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하고 불안한 느낌. 잠시 소강상태였던 출혈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심각하게. 마치 이번에는 가볍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경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