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일주일 정도면 출혈이 멎으리라 믿었다. 당시 외부 업체에서 의뢰받은 일도 양해를 구하고 약 일주일 정도만 미뤄뒀을 뿐이다. 하지만 이후 2주가 넘도록 출혈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한꺼번에 와락 피가 쏟아지는 통에 급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몰려왔고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결국 매 끼니 남편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 먹일 만큼 나는 활동량을 현저하게 줄였다. 특정 상황이나 자세에서 출혈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패턴은 없으니 그저 최대한 무리하지 않는 것 이외에 뚜렷한 예방법이 없었다. 출처 모를 피가 몸 밖으로 나오다 보니 매사 몸은 힘이 없고 고단했다. 무엇보다 임신 중 출혈이 좋은 증상일리 만무했고 시간이 지나도 그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만큼 침착해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자궁 내벽을 튼튼하게 한다는 프로게스테론 약을 처방받아먹었지만 출혈 증상에 보탬에 되지는 않는 듯했다.
매주 화요일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이었다. 매주 병원을 찾아 진료실 문에 들어서기 전까지 혹여나, 오늘은 정말 초음파에 아이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손발이 차게 식고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아직 태동과 같은 증상은 없을 때라 오로지 초음파 모니터를 통해서만 임신 유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의학적으로 평생 그를 전공한 의사조차 내 상태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았다. 출혈의 원인도 출혈을 멎게 할 처방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매주 모니터에 태아의 모습이 뿅 하고 잘 보이기를 함께 바랄 뿐이었다. 종종 뭐가 출혈점이고 뭐가 아기집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궁 속 상태가 그야말로 엉망일 때도 있었다. 임신 8주차 진료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사 선생님이 “여기 아기가 보이네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기어코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구나’ 라며 침통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렁이는 너울 속에서도 너는 망설임 없이 차곡차곡 자라나고 있었다. 동그란 형태에 어느덧 새싹 같은 손과 발이 돋아나더니 곧 ‘몸’이 생긴 것이 신난다는 듯 작은 손발을 파닥거리며 놀았다. 종종 피를 흘리다 지쳐 누워있을 때면 병원 모니터 속에서 신나게 헤엄치던 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욘세의 ‘싱글 레이디’ 노래에 맞춰 좌우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상상했다. 그러면 조금은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2월.
우리 부부는 12주차(임신 3개월)가 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의사도 손수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유산의 위험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12주차를 강조하곤 했다. 인터넷을 봐도, 산부인과 전문가들의 유튜브와 각종 블로그 글 속에서도, 임신 초기와 중기를 구분 짓는 12주의 벽은 임신 중 최대 고비가 지나가는 시점이라 말했다. 12주의 마법이 우리 부부에게도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어린이 같은 심정이었다. 의사가 그린 그래프 위, 12주차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보면서 진짜 저 시기만 무사히 지나간다면 지금의 모든 힘든 상황이 마법처럼 나아질 것만 같은 묘한 믿음이 샘솟곤 했다.
2월 중순에 접어들 때쯤 서서히 출혈의 양은 줄어들었다. 물론 안심할 만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주 약간이라도 무리를 하면 다시금 심한 출혈이 시작됐다.(약간의 무리란, 짧은 산책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 이외의 소소한 활동을 말한다.) 그렇기에 ‘12주차’를 지나는 2월 중순이 오기를 고대하고 고대했다. 내 상태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심지어 언어 소통도 원활하지 않은 튀르키예에서 지금의 내 상황을 속 시원히 하소연할 곳은 요원했다. 당시 내 일상은 침대에 누워 임산부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네이버 카페를 들락거리는 일이 전부였다. [출혈]이나 [하혈] 같은 키워드로 검색되는 카페 게시글은 시기를 막론하고 죄다 훑어보았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주차의 사람들은 임신 중 어떤 몸의 변화를 겪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출혈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들이 많았다. 출혈에 놀라 울며 응급실로 달라겼다던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집안일을 하다가, 첫째를 돌보다가 갑작스럽게 피를 쏟으며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내용의 글이 생각보다 많았다. 종종 오랜 출혈로 심신이 상하고 있어 힘들다는 글이 눈에 띄게 되면, 앞선 글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여 글의 내용과 댓글과, 글쓴이의 예후들을 살펴봤다. ‘내가, 혹은 내 주변 누군가는 임신 내내 출혈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아이를 낳았으니 걱정 말아라’ 등의 글쓴이를 안심시키는 댓글도 항상 눈에 띄었다. 간혹 피가 보이는데 당장 병원을 가야 할지 고민이라는 글 아래에는, 카페 검색 그만하고 얼른 병원으로 뛰어가길 재촉하는 댓글이 반드시 달려있었다. 서로 얼굴도 나이도 사는 지역도 모르는 사이지만 아이를 품은 여성으로서 연결되는 유대감은 굉장했다. 그것은 옆에 있는 남편조차 내게 전해줄 수 없는 강렬하고 끈끈한 감정이었다. 글만 읽던 나도 어느새 카페에 하나 둘 내 걱정들을 옮겨 적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 역시 전문가의 견해가 아닌 개개인의 주관적인 경험담일 뿐이지만, 망망대해 섬에 있는 듯 위태롭던 당시의 나를 향한 이름 모를 사람들의 위로는 큰 힘이고 위로였다.
2월 말, 드디어 12주차에 접어들었다. 심란하게도 마법처럼 몸이 개운해지지는 않았다. 확실히 지난 몇 주보다 컨디션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기는 했지만 말끔하게 피의 흔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나는 여전히 침대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밖은 조금씩 봄의 기운이 돌았다. 12주가 지나자 뱃속 태아의 실루엣에서 제법 ‘아기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머리에는 작게 솟은 코와 둥근 뒤통수가 제법 귀여웠다. 목아래로는 선명하게 척추가 보였고 팔과 다리 윤곽도 또렷해져 초음파상으로 보이는 태아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더 분명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병원에서 권하는 NIPT검사(Non-invasive prenatal test. 태아 DNA 선별검사)를 위해 내 혈액을 채취했다. 산모의 혈액 속에서 태아의 DNA를 선별하여 아기에게 선천적인 문제가 없을지 확인하는 검사로, 튀르키예에서는 한국과 다르게 이 검사로 파악된 아이의 성별을 바로 알려준다 했다.(한국에서 검사를 받을 경우, 성별은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임신 14주차, 즉 임신 3개월 반쯤에 접어들어서야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출혈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몸도 조금씩 가뿐해졌다. 침대에 눕혀져만 있던 몸을 일으켜 조금씩 미뤄뒀던 일들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아무 탈 없이, 이 임신이 유지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안도감에 사로잡힌 채 3월 봄의 초입과 꽃의 만개를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