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 동쪽에는 남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코리아타운이 끝나는 윌셔 대로 건너편 웨스트 레이크 지역.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남미에서 온 저소득층이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불법체류자도 많다. 일용직이나 단순노동 등 미국 사회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하부구조를 떠받치는 사람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네는 빛이 참 좋다. 앞에 커다란 공원이 뚫려있어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을 방해할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실크 같은 캘리포니아 오후 햇살이 낡은 동네 위로 떨어지면 그 부드러우면서도 투박한 질감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남미 특유의 화려한 원색들이 어우러질 때면 더욱 드라마틱하다.
이날 나는 이 동네 길거리 장터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거리의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고, 농담도 하고, 때로는 사진 찍는다고 욕도 먹으며 한 컷 한 컷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렇게 장터의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나는 옷을 파는 작은 좌판 앞에 멈춰 섰다.
디스플레이란 말이 민망할 만큼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옷가지들. 별 의미 없던 이 녀석들도 그윽한 햇살을 받으니 나름 괜찮은 오브제로 눈에 들어온다. 널려있는 모습도 새삼 재밌다. 옷들은 마치 일생 동안 한 사람이 변태하며 벗어놓은 껍데기들 같았다. 어린 날의 껍데기, 젊은 날의 껍데기, 기뻤던 날의 껍데기, 힘들던 때의 껍데기.
카메라를 갖다 대고 뷰파인더로 구도를 잡았다. 그때였다. 문득 그 위에 남자가 서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이곳에 멈춰 선 이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기에 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얼굴에 기다란 해그림자를 받으며, 태양이 물러나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략 1분은 지난 것 같았다. 1초를 1/60, 1/125로 쪼개는 사진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1분은 무척 긴 시간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찬찬히 그를 바라봤다. 지친 듯한 표정, 몇 년은 입었음직한 싸구려 점퍼와 청바지, 그리고 가볍게 외출한 것 같지 않은 묵직한 백팩.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생각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꿈일까.
갈 길을 서두르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갈 곳을 모르는 것 같았다. 카메라를 의식하면 대개 자리를 떠나버리는데, 그는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노을이 지는 하늘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질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전부 인지도 모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내일은. 내가 골목을 한 바퀴 돌아 장터를 빠져나올 때까지 그는 계속 그렇게 서있었다.
집에 돌아와 필름을 현상하고 제일 먼저 그의 사진에 루페를 갖다 댔다. 두 컷밖에 찍지 못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표정은 남아있었다. 스캔을 하는 동안 노래 하나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Donde Voy: 어디로 가야 하나'. 가난으로 밀입국한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다.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찌른다. 그는 그냥 해거름을 감상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데, 가끔씩 쓸데없이 과한 내 감성이 지어낸 얘기였으면 좋겠다.
Donde Voy - Tish Hinojosa (한글자막 있음)
https://youtu.be/lZKJ1MiZ0Yw?si=4GrOWfC6BihzJO5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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