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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돌이 Sep 25. 2020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나일까

TVN 드라마 ‘청춘기록’ 감상문

학교에서 아이들을 다독일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정서적 안정입니다. 학생과 상담하면서 ‘자존감’이라는 단어 자체를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늘 염두에 두는 이유는 결국 학생 자신의 마음이 안정을 되찾은 후에야 다른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청춘기록’을 보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등장인물 대부분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체득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저에겐 다른 드라마와 다른 매력 포인트였습니다.


2020년 현재, 자존감이란 단어는 너무 흔해져서 식상할 정도의 단어가 되었지만 이 말이 이렇게 유행(?)하게 된 데에는 1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자아존중감이라는 말 자체는 90년대부터 사용되었고 학계에서는 self-esteem으로 꽤 오래전부터 통용되던 말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각종 매체나 자기 계발서 등에서 이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인공 사혜준(박보검)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집이 가난해서 엄마가 친구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할지라도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을 구분 지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엄마(하희라)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들에게 친구네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게 되었다고 ‘먼저’ 알리고 ‘나는 이러저러한데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싫다면 그만두겠다’라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저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습니다. 자식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엄마로서 그 정도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기에 아들 또한 그렇게 자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에 반해 원해효(변우석)의 엄마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해효는 잘 자랐고 혜준이 못지않은 건강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저는 이 간극이 앞으로의 드라마 완성도의 향방을 가르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혜준과 해효의 대비, 그 엄마들의 대비에서 과연 이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어느 한쪽이 반성 혹은 개과천선의 모습을 보이거나 찬양 일변으로 흐른다면 그저 그런 드라마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크지만 엄마의 사려 깊은 교육이 혜준이를 키워냈다면, 냉정하기만 한 아버지와 과도한 집착이 해효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혜준과 다른 형(사경준, 이재원 역), 해효와 다른 동생(원해나, 조유정 역)이 보태집니다. 이 미묘한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석해나갈지 묘한 기대감을 품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저는 ‘자존감’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올여름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질 일을 겪었고 혼돈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고 이 드라마를 보면서,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역할이 한 사람의 자존감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혜준이에겐 엄마가 있었고, 할아버지에겐 혜준이가 있었습니다. 형에겐 아빠가 있었죠. 해효와 그 동생에겐 누가 있었을지 아직은 잘 판단하기 힘들지만, 안정하(박소담 역)에겐 아빠가 있었고 후배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을 때 칭찬해주고 슬픔에 빠졌을 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이상 있었죠. 그런 점에서 악독해 보이기만 하는 이태수(이창훈 역)의 주위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을 때,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그런 이야기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한 명만 있다면 그 학생은 절망에 빠지거나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친구든, 가족이든, 선생님이든 그 누구이든 말이죠. 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결정적 순간에 마주치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혜준이 엄마와 같은 용기와 지혜가 제게 있을지 자신은 없습니다.


한편으론 걱정도 됩니다. 혜준이의 자존감은 엄마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형성된  같은데 아빠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모래성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여기엔 올여름의  개인적 경험이 투영된  같기도 합니다. 저는 여태껏  자존감이 튼튼하다고 여기고 살아왔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해왔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모든  허물어지고 자기부정에 빠졌다는  느꼈거든요. 그래서인지 혜준이가 아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드라마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걱정되는 이유가 바로  지점입니다.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학생들이 있는데 제가 그걸 무너뜨려 버리는 것은 아닐지 확신할  없다는 점에서요.


김수현식 드라마의 대사를 2020년식으로 풀어내는  드라마를 저는 청춘 드라마 외피를  새로운 가족 드라마로 기는 중입니다. 박보검의 빛나는 외모 앞에서 ‘역시 얼굴이 받쳐줘야 저런 말도 먹히는구나라는 자괴감과 박소담의 푸른 청춘의 모습, 할아버지(사민기, 한진희 ) 푸근함과 신애라, 하희라가 엄마 역할을 하는 흥미로움, ‘블랙독​’  착한 선생님이 저렇게 사악한 역을 소화한다는 놀라움까지 색다른 재미로 다가오는 중입니다.


부디 ‘스카이 캐슬’이 보여줬던 허망한 용두사미​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며, 의도와 상관없이 나에게 상처 줬던 이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진심으로 나를 도와준 여러 사람들의 고마움을 되새겨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면, 그 와중에 제가 작은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다면 참 기쁘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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